▲ 1922년 1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최진동(사진 오른쪽) 장군과 홍범도 장군.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10월 청산리대첩을 이끈 주역으로 김좌진 장군이 부각됐다. 1990년 한러수교 이후 자료 발굴로 홍범도 장군이 집중 조명됐다. 그러나 아직도 주요 인물들의 실제 비중과 역할은 연구가 부족하다. 봉오동전투의 인적·물적 뒷받침과 군사근거지 제공, 지형지물을 이용한 작전지휘로 일제 정규군과의 최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최치흥 삼 형제가 그에 해당한다.

통역관-대지주-반일무장투쟁론자

최진동(1883~1941)은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의 아버지 최우삼과 어머니 이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최우삼은 고종이 파견한 북간도 연변 관리책임자(도태)였는데, 국경분쟁 등 청나라와의 갈등으로 입지가 좁아지면서 그 아들들의 어린시절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최진동은 중국인 대지주집 머슴을 살다 양자로 들어가 큰 재산을 물려받고, 왕청현 관공서 토지관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봉오동 일대 황무지를 사들여 점차 대토지 소유자가 됐다. 또 동생 최운산·최치흥과 함께 동삼성(동북3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복무하며 군사적 능력을 배양했다.

1902년 고종에 의해 북변간도관리사로 파견된 이범윤이 이주 조선인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1903년 8월 충의대, 1904~5년 러일전쟁 당시 사포대를 만들어 군사훈련을 시키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때 최진동은 많은 군자금을 제공하고 그간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단련한 장정들을 동참시켰다. 1906년 이상설이 용정에 와서 서전서숙을 개설했을 때도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가 1907년 8월 두만강을 건너 개산툰·연길을 거쳐 희막동에 왔을 때도 무력에 의한 반일독립운동방침을 의논했다. 1912년 봉오동 중촌에 학교를 개설해 애국계몽사상을 전파했고, 이동춘·구춘선·정재면 등이 간민회 총회본부를 설치했을 때는 왕청현 분회장을 맡기도 했다.

3·1 운동 당시 연변 일대에는 3월13일부터 4월 말까지 46차에 걸쳐 8만6천670명이 참석한 반일 집회시위가 벌어졌는데, 최진동도 이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그해 1919년 9월 강우규가 경성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를 향해 던진 수류탄도 최진동에게 받았다고 연변 사학자들은 전한다. 1919년 겨울 드디어 도독부 독립군을 건립했는데, 초기 무장력이 1개 대대 산하에 4개 중대, 중대 산하 2개 소대, 총병력 200여명이었다.

봉오동전투의 오너 최진동, CEO 홍범도

최진동의 도독부 독립군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과 연합해 1920년 봄부터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회령·종성·온성 등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 목표로 여러 차례 국내 진공을 벌였다. 그해 4월18일 30여명의 대원을 지휘해 온성군 향당동 소재 일본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군의 대규모 반격에 대비해 안무 사령부 부관, 이원 연대부 장교, 최진동 사령관, 홍범도 연대장과 6개 중대로 연합부대를 재편성해 놓았다.

1920년 6월4일 최진동·홍범도 부대의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던 1개 소대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격파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을 가했다. 일본군을 유인한 후 100미터 고지에서 또 사격을 퍼부었다. 소좌 야스카와가 지휘하는 보병과 기관총대 1개 대대가 출동했는데, 독립군은 퇴각해 안산 촌락 후방 고지에 매복했고 6월7일 새벽 매복권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자 일제히 총격을 가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은 다시 야마자키 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해 고려령 서방에 도착했을 때, 독립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참패했다.

일제 정규군과의 최초 전투였던 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독립군은 장교 1명, 병사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최진동·홍범도는 그해 7월11일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노두구에서 간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 다수의 부상자를 냈다. 이 뉴스가 대서특필돼 조선과 만주의 반일 기운을 높이자 일제는 더욱 당황했다.

청산리대첩의 동부전선 사령관

일제는 1920년 8월 ‘간도지방 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고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다. 중국으로 본격 출병할 음모를 꾸미는데, ‘훈춘 사건’이 그것이다. 일본군 19보병사단 간부가 비밀리에 중국 마적 두목 장강호를 만나 돈과 무기를 주면서 두만강 건너편 훈춘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를 구실로 미리 대기시켜 놓은 조선군 19사단 9천여명, 시베리아로 출동했던 14사단 4천여명, 11사단·19사단·20사단, 북만주 파견대와 관동군 각 1천여명 등 모두 2만여명의 군단급 병력을 간도에 투입했다.

일제 대군이 몰려오자 독립군 부대들은 백두산으로 이동했다. 홍범도 부대는 9월20일께 어랑촌 부근에, 안무 부대는 9월 말 이도구 방면에 도착했다. 서일·김좌진이 이끄는 대종교 계통의 북로군정서는 9월9일께 사관양성소 사관 298명의 졸업식을 마치고 10월12~13일 청산리에 도착했다. 독립군 연합부대의 전투 병력은 3천명 이상 최대 4천700명 정도로 추산되며, 비전투원 1천여명 정도가 물자 수송·보급, 자금과 무기·탄약·식량 조달 등을 맡았다.

군사력에서 압도적 열세였으나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청산리대첩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됐다. 이때 최진동은 대한총군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돼 9월 말께 나자구에 도착, 동부전선에서 싸웠다. 일제의 ‘토벌계획’을 교란하고 김좌진·홍범도 등의 주력부대가 있는 백두산 인근 서부전선을 지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통합독립군의 외교부장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에서 연속 참패한 일본군은 경신 대참변을 일으키며 집요하게 추격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소만 국경 지역인 흑룡강성 밀산시에 모였다. 이곳에서 1920년 12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북로군정서(서일·김좌진·김규식), 대한독립군(홍범도), 대한신민회(김규면), 대한국민회(구춘선), 의군부(이범윤) 10개 부대, 약 3천500명이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 재편됐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참모부장은 김좌진, 참모는 이장녕과 나중소, 군사고문은 지청천이었다. 최진동은 외교부장을 맡았다.

대한독립군단은 안전한 후방기지와 무기·병참 보급이 매우 절실했고 마침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약소민족의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했다. 1921년 정월 동쪽으로 이동해 소만 국경을 넘고 우수리강을 건너 연해주 이만(현재 달네레첸스크)에 재집결했다. 다시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안전한 후방인 자유시(스보보드니, 黑河)로 이동했다. 여기에는 만주의 독립군들만이 아니라 러시아령 내에서 백군에 맞서 적군과 연합해 싸우던 조선인 의병대들, 즉 이만군대·다반군대·이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군대 등도 모두 모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독립운동 역사에서 가장 쓰라린 대참변이 벌어졌다. 러시아 내전 중에 혁명세력인 적군은 독립군 진압을 구실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부담스러워했다. 일본이 반혁명세력인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백군 진압에 독립군을 동원하려는 적군과 만주로 출병해 반일 무장투쟁을 바라는 독립군의 생각 차이,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의 군 지휘권 갈등,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정치적 대립 등이 겹쳤다. 적군이 설득했으나 일부가 끝까지 거부해 무력진압에 들어가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명의 희생을 낳은 자유시참변이 그것이다.

극동민족대회 참가, 레닌에게 권총 선물받아

1921년 3월 통합독립군을 적군 산하로 재편하려 했을 때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이만에서 밀산으로 되돌아갔으나 최진동·홍범도 등은 자유시로 가서 부대 재편에 순응하고 적군만이 아니라 코민테른과의 협력 관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1922년 1월21일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도 참가해 레닌을 접견하고 권총 선물도 받았다. 이 대회에 참가한 동생 최운산도 여운형 등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그 후 최진동은 자유시 일대를 근거지로 연변지방에 무장대를 파견하거나 자신이 직접 이끌고 왕청현 라자구 방면으로 진출해 군자금 모금, 반일 선전, 일제관공서 습격을 했다. 1922년 6월 옴스크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80여명의 생도를 모집해 개소식을 가졌고, 9월 홍범도와 함께 치타 지방에 있는 약 200여명 조선인 암살단의 최고 고문을 맡았다. 11월에는 고려혁명군 1천여명이 백군을 훈춘 방면으로 축출할 때, 김규면과 함께 부대를 이끌고 조선 국경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1923년 초 최진동은 러시아에서 중국 동북지방으로 돌아온 뒤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모색하고 온성군 국내 진공을 위한 훈춘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토지를 임대 개간해 이상향 건설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4년 9월 다른 군벌, 오패부의 간첩이라는 오해를 받아 동녕현 경찰에게 체포돼 길림감옥에 갇혔다. 1926년 8월 석방돼 12월6일 연길도윤공서에 신고서를 냈는데, 이때부터 최진동은 그간의 반일무력항쟁을 마감하고 자치촉진회 등에 머물렀다.

친일 의혹은 억측

그사이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계파활동에 빠진 큰아들 최국신에게 체벌을 가해 죽게 하고 간호하던 큰며느리도 따라 자결하는 불행이 있었다. 자책감과 건강 악화로 운신하기도 어려웠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끊임없이 지주들에게 헌납을 강요했는데, 부인이 집안을 위해 남편 몰래 당시 돈 100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1940년 일본헌병대가 비행장 확장 공사에 땅을 기부하라고 또 강요했다. 최진동은 이를 거절하다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으나 1941년 11월25일 고문 후유증으로 만 58세에 애석하게 별세했다.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그의 묘지는 중국 봉오동 토성리에 있었는데, 2006년 4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겼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근 일부에서 최진동 장군에 대해 친일 의혹을 제기했으나 과도한 억측으로 보이며, 1920년대 반일 무장투쟁의 걸출한 지도자라는 역사적 평가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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