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러시아령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찍은 홍범도(1868~1943) 장군 부부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첫사랑과 파계, 그리고 의병 활동

홍범도((洪範圖, 1868~1943)는 1886년 8월27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7일 만에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동네 부인들에게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다. 9세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됐다. 그는 생계를 위해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15세 되던 1883년에는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양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3년여의 병영생활에서 그는 사회적 모순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다. 군교(장교)들의 비리와 부정부패, 병사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한 홍범도는 상관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했다.

홍범도는 황해도 수안의 제지소 노동자로 3년간 생활하고 여러 곳을 떠돌다가 금강산 신계사로 가게 됐다.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지담대사의 상좌승 노릇을 했다. 이때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들었고 반일의식을 갖게 됐다.

홍범도는 신계사에서 여승과 사랑에 빠졌다. 홍범도는 파계한 뒤 단양 이씨와 함께 신계사를 떠났다. 그는 강원도 회양군 먹패장골에 정착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사는 한편, 군대서 익혔던 사격솜씨로 사냥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헤어졌다. 두 사람은 후에 재회하지만 홍범도를 추적하던 일본군에 이씨가 잡혀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된다.

1895년 11월 홍범도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뒤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해 봉기했고, 경기·강원과 관북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해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홍범도는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한 뒤 12명의 동지를 모집해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김수협이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도 전사·도주해 혼자 남게 됐다. 홍범도는 1898년까지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의병활동을 전개했다.

‘날으는 홍범도’ 장군

1907년 일제의 군대 해산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전개됐다. 일제는 그해 9월3일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을 제정하고 강제 시행했는데 총으로 수렵 생활을 하며 살던 산포수들에게는 근본적인 생계 위협이었다. 홍범도는 차도선과 함께 포수들을 설득해 같은해 11월15일 북청 포수들을 주축으로 농민과 광산노동자, 북청 진위대의 해산군인 등 70여명을 규합해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봉기했다.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22일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습격해 일본군인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했고, 25일에는 이곳에서 일본 군경 70여명과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홍범도 부대는 삼수군과 갑산읍을 공격해 점령하고, 헌병분견소와 순사주재소·우체국·일본군 관사 등을 습격해 소각했으며 일진회 회원과 친일 관리, 부호, 일본인 군관민 등을 응징했다. 또한 일본인 금광을 습격해 금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하는 등 실로 대담무쌍한 활동을 벌여 일본군과 경찰·일본인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이처럼 놀라운 활약으로 ‘날으는(나는) 홍범도’라는 별칭이 붙었다.

러시아 망명과 의병·권업회 활동

홍범도는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1908년 11월 만주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군자금을 마련한 홍범도는 1910년 4월 초순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명의 의병부대원들과 함께 추풍(秋風)을 출발해 국내로 진격했다. 그해 4월 중순 간도를 거쳐 함북 무산에 진입한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5월 초순까지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차례 접전을 했으나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재차 연해주로 망명한 홍범도는 유인석이 중심이 돼 추진한 13도의군의 조직에 참여했다. 1910년 8월 한인 동포들이 성명회를 조직해 활발한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했다. 러시아 당국이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성명회는 9월 해체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했고, 홍범도를 비롯해 이종호·이상설·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 권업회를 1911년 5월 연해주에서 창립했다. 홍범도는 처음 권업회 부회장에, 나중에는 사찰부장이 돼 신문발간과 민족교육 사업, 한인의 경제력 향상과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봉오동 전투의 주역 홍범도 장군

1919년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해 1919년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섰다. 홍범도는 러시아령에서 대한국민의회 소속 군대 일부를 인솔하고 9월 간도에 도착한 뒤,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하고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 300여명의 병력에, 소총 200여정과 권총 30정의 화력을 확보했다. 사령관은 홍범도, 부사령관은 주건, 참모장은 박경철 등이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무렵부터 봉오동 일대에 오랫동안 터전을 잡고 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해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기습 공격에 대해 일제는 조선주둔 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하여금 홍범도의 독립군 부대를 추격하게 했다. 그러나 추격부대는 삼둔자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했다. 홍범도 부대에 연패를 당한 일제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1920년 6월7일 봉오동 지역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해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를 비롯해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 등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해 대승을 거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 1920년 12월15일자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독립군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냈을 뿐이었다.

독립군 최대의 승첩 청산리 전투의 주역

독립군의 국내 진공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1920년 8월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간도 진격에 나섰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해 그해 10월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해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조작 사건을 일으켰던 것. 일제는 이를 빌미로 직접 병력을 투입해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그러나 독립군측은 ‘훈춘사건’ 이전에 이미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간파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를 피하고, 간도지역 한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10월20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대한신민단·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들은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와 3도구에 집결했다. 독립군의 움직임을 첩보원을 통해 파악한 간도 침략 일본군은 2·3도구 방면으로 진입해 독립군을 공격했다.

첫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해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야마다(山田) 부대 사이에 그해 10월21일 오전 8시께부터 전개된 백운평 전투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유인해 섬멸하는 대승리를 거뒀다. 이어 홍범도 장군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2도구 완루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뒀다. 이후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합동으로 10월26일까지 천수평·어랑촌·맹개골 만기구·천보산·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의 격전을 치렀고 모두 승리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 및 피해 숫자는 자료마다 서로 다르지만 임시정부가 조사·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전사자는 1천200여명에 부상자가 2천100여명이었으나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명에 부상자 220여명에 불과했다.

돌아와야 할 길, 늦어지는 유해 봉환

청산리 전투 승리 후 홍범도 장군은 700여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1921년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곳에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 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면서 비극이 일어났다. 자유시사변으로 불리는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독립군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져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됐다.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 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다. 홍범도 장군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연해주 등의 집단농장과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홍범도 또한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범도는 1943년 10월25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 정부는 1962년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으나 홍범도는 냉전시대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약상에 어울리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현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안치돼 있다. 2019년 한국 정부와 카자흐스탄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 송환에 합의하고 봉오동 전투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맞춰 봉환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늦춰지고 있다. 돌아올 길이 좀 늦어지고 있지만 결국은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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