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 정기훈 기자

지식과 경험은 이렇게 쓰는 건가. 국회의원 시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약하고 이후 청와대 여성가족비서관을 거친 은수미(57·사진) 성남시장이 최근 눈에 띄는 조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남시의회가 지난달 24일 정례회에서 의결한 ‘일하는 시민을 위한 성남시 조례안’이다.
성남시가 발의한 이 조례는 특수고용직과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를 ‘노동하는 시민’으로 규정하고 지방자치단체가 이들의 권리 보호·증진을 위한 정책을 펴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조례를 근간으로 성남시는 좋은 일자리 사업과 노동환경 개선, 특수고용직 노동권 보호사업, 노동안전보건 사업을 한다. 휴게공간과 통신공간도 일터로 보고, 공간 개선대책을 추진한다. 내년 1월1일부터 시행한다.
은수미 시장은 “성남시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중앙정부 차원의 전 국민 고용보험, 전 국민 노동법으로 이어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전 국민 노동법 혹은 일각에서 제기되는 ‘모든 일하는 사람을 위한 노동법’은 특수고용직을 비롯해 자영업자를 법으로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국회 차원의 논의가 시작도 되기 전 성남시에서 실험에 들어가는 셈이다. 은수미 시장에게 일하는 시민을 위한 조례안의 취지와 목표, 구체적 사업 방향을 물었다. 인터뷰는 지난 2일 오전 성남시 중원구 성남시청 시장집무실에서 이뤄졌다.

“코로나19 양극화, 극복 못하면 공동체 깨진다”

- 조례는 왜 제안했나.
“위기의식이 있다. 제조업 시대에서 급속히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 코로나19까지 겹쳤다. 과거와 다른 양상의 양극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저신뢰 사회로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공동체가 깨져 버릴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급격히 나타난다. 지자체는 코로나19로 나타난 사회적 현상의 맨살을 쓰다듬는 행정을 한다. 사람들이 무엇에서 고통받고,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디에서 좌절하고 포기하는지 굉장히 빨리 느낄 수 있다. 코로나19, 디지털 시대 전환, 정치적 ‘부족주의’로 인해 사람들이 편을 짜 싸우고 혐오와 모욕을 전면화하는 시기라는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우리가 느끼고 깨달은 위기 신호를 지자체 내에서 해소할 뿐만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어떻게 풀어 가야 하는지 반응이 나와야 한다. 지자체 차원에서 간절히 ‘노력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노동의 관점에서 코로나19로 심화한 사회적 문제에 접근한다는 구상은 생소하다.
“97년 외환위기로 심화한 양극화는 지금까지 우리 발목을 잡고 있다. 디지털 시대와 코로나19 위기가 결합한 위기가 다시 도래하고 있다. 함께 사는 사회를 꿈꾸지 않으면, 공동체를 회복하지 않으면 사회 유지가 가능할까 의문이 든다. 이를테면 코로나19로 학교라는 공적공간이 무너지고 기능이 마비됐다. 사적공간인 가정에서 교육이 이뤄진다. 공적공간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평등하지만 사적공간은 매우 불평등하다. 누구는 방이 있고, 누구는 컴퓨터가 있고, 누구는 돌봐주는 가족이 있다. 사적공간의 불평등이 시민의 권리를 사로잡고 있다. 위기의 근본 중 하나가 경제적 토대에 있다는 말이다. 일자리를 통해서 시민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시작해야 한다.”

“코로나19가 타격한 계층, 기존 노동법으로는 포괄 못 해”

- 조례 제정 과정은 어떠했나.
“이 문제를 고민해서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게 2018년 12월이니, 제정까지 2년이 걸렸다. 노동전문가와 공무원들이 참여하는 성남노동포럼이 그 출발이다. 노동포럼에서 나온 제안 중 하나가 가칭 일하는 시민을 위한 조례였다. 코로나19가 본격화하던 올해 초에는 기초자치단체 역할과 노동정책·사회복지·고용안전망 검토를 위해 전문가포럼도 3개월간 진행했다. 성남지역 실정에 부합하는 조례안을 만들기 위해 특수고용직·플랫폼·프리랜서 노동자, IT노동자와 간담회를 개최하며 의견을 청취했다.”

- 논의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은 없었나.
“우리는 노동자라는 말에 익숙하다. 노동자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런데 노동자라는 과거 개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지, 일하는 시민이라는 말로 포괄할지, 여기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했다. 상위법이 없는 상황에서 지자체가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겠냐는 점도 고민 대상이었다. 성남시에서 조례를 만들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논의를 전국으로 확산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상위법으로서 전 국민 노동법이 필요하다는 데까지 논의가 확산했다. 조례를 만들 수 없더라도 코로나19 상황에서 지자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광범위한 토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 준비했다.”

- 조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노동권을 시민기본권 개념으로 접근했다. 노동관계법에 따른 노동자뿐 아니라 모든 일하는 시민으로 적용 대상을 확대해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각지대 노동자인 특수고용직, 1인 자영업자, 실업자 등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성남시는 150억원을 투자해서 매년 354개 축제를 한다. 올해 이 사업이 싹 날아가 버렸다. 축제와 연관해 일하는 미용·사진·무대장치·기획 분야의 프리랜서는 다 망했다. 먹고살 방법이 없어진 거다. 이런 사람들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은 일하지 못하면 시민으로서 권리도 실질적으로 상실한다. 시민으로서 삶을 살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면 적어도 지자체 차원의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든지, 기존 사회안전망에 편입할 수 있도록 보험료를 지원하든지 대책이 필요하다. 기존 정규 노동에 부여됐던 여러 사회안전망을 어떻게 하면 디지털 시대의 노동, 플랫폼 노동, 기존과는 다른 노동으로 확장할 수 있을지 그 근거를 만들어야 했다.”

- 조례 제정에 따라 준비하는 사업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사회안전망이다. 취약계층 고용보험 지원도 가능하고, 휴가나 병가수당도 지원할 수 있다. 일자리기금을 실제 만들고 집행하는 제도를 설계하려 한다. 10명 미만 영세 사업체에 사회보험료를 추가지원하고, 플랫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상해보험 가입을 준비하고 있다. 일하다 다치면 최소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프면 쉴 수 있도록 유급병가 지원도 하겠다. 노동 취약계층이나 특수고용직이 입원치료나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성남시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 정기훈 기자

 

‘일하는 시민’에 병가수당 지급, 상해보험 가입 추진

- 지자체 차원에서 노동의제를 정책으로 만들고 행정으로 연계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정말 어렵다. 중앙정부는 고용·노동정책을 지자체 차원에서 만들 수 있는 어떠한 근거자료도 주지 않는다. 고용보험·건강보험·국민연금 관련 정보를 받을 수 없다. 예술인과 프리랜서를 지원하고 싶은데 정보가 없다.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그 많은 시간강사는 일자리를 잃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민인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하는 것이 지자체 본연의 역할인데, 할 수가 없다. 코로나19 서비스는 방역만이 아니라 생활지원도 뒤따라야 한다. 어떤 동에 장애인·경력단절여성이 얼마나 있는지 정부는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지자체는 볼 수도 없다. 성남노동포럼을 진행하면서 경력단절여성·청년 일자리 관련 조사를 2년이나 했다. 중앙정부에서 받기만 했어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을 거다. 적시에 지원도 가능했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그야말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서비스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맨발로 뛰어다녀야 하는 실정이다.”

- 장시간 노동, 노동시장 이중구조 등 산적한 노동과제 중 지자체 차원에서 접근 가능한 것이 있을까.
“산업재해다. 올해 이천 화재 참사가 발생했다. 화재에 취약한 우레탄 소재 사용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자체는 사업장 재난 관련 시설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불에 잘 타는 소재를 쓰지 않도록 금지할 수도 있다. 산재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시설에 대한 개선 명령을 내리고 점검 조치를 하는 것은 고용노동부보다 지자체가 더 빠르다. 노동부와 지자체가 협력하면 산업안전 서비스에 훨씬 효과를 낼 수 있다. 아동수당도 보건복지부가 담당하지만 서비스는 지자체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특정 현장과 어떤 사안을 점검해 달라고 노동부가 요청하고 지자체가 행동하면 산재예방 효과는 올라간다. 건설현장 비계설치나 안전장비 구비 여부 등을 수시로 점검할 수 있다.”

- 조례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확산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당연히 중앙정부가 가져가야 한다. 성남시에만 특수고용직·플랫폼 노동의 사각지대 문제가 심각한 것이 아니다. 전 국민 노동법이 우리의 목표일 수 있다. 전 국민 고용보험법 논의가 진행 중인데, 그 논의 속에 전 국민 노동법 논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

- 성남시 사례를 다른 지자체서 할 수 있을까.
“모범 사례가 만들어지면 가능할 것이다. 기초자치단체는 독자적 노동행정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그에 맞는 사례가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는 재정 자립도가 지자체 중 높은 편이다. 그래서 독자적 예산으로 노동행정이 가능하다. 만약 중앙정부가 이런 사업을 추진하면 국비를 받아 지자체가 서비스할 수 있다. 일단은 우리가 해 보려 한다. 코로나19 긴급지원 사업을 했다. 이런 경험을 반영해 각 지자체가 조례로 담아 내면 된다. 기대하고 있다. 아마 다른 곳도 하게 될 것이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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