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신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가을이다. 가을은 들국화와 코스모스를 볼 수 있어 좋다. 추석을 앞두고 고향으로 벌초하러 가면서 들녘에 피어 있는 들국화와 코스모스를 만났다. 꽃 이름이 들국화라는 꽃은 없다. 들에서 피는 국화를 들국화라고 부른다. 그래서 들국화는 여러 종의 꽃이 있다. 감국·산국·구절초·쑥부쟁이가 대표적인 들국화다. 제주에 있는 해국도 들국화로 부른다.

나는 들국화 중에서 쑥부쟁이를 으뜸으로 친다. 쑥부쟁이도 여러 종이 있지만, 내 고향 지리산 들녘에 흐드러진 쑥부쟁이가 좋다. 연보랏빛을 띠는 꽃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빼곡하지도 않으면서 공간의 여유를 두고 작은 무리를 이뤄 송글송글하게 핀다.

코스모스는 색이 예쁘다. 하양·분홍·진분홍·진보라가 매혹적이다. 코스모스는 여러 색 꽃이 어울려 피는 것이 일품이다. 꽃도 일품이지만 코스모스는 약해 보이면서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느다란 꽃대가 길게 이어지고 그 끝에 꽃이 달린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춤을 춘다. 그런데 웬만해서는 꽃대가 부러지지 않는다. 연약해 보이지만 바람을 이기는 강함이 있다. 김수영이 쓴 시에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에 코스모스도 있는지 모르겠다.

모든 꽃이 그렇듯 여러 색과 꽃망울이 무리를 지어 피울 때가 가장 예쁘다.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혼자 피어 있으면 가치가 반감된다. 노동자도 혼자는 힘이 없는 법이다. 사용자와 종속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사용자는 노동력과 임금을 교환하는 근로계약 관계에 있지만 이 계약은 대등하지 않다. 계약은 사용자에 의해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파기될 수 있다. 사용자는 언제든 필요에 따라 대체 노동력을 구하려 들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역사적으로 그 필요라는 조건에서 노동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조합을 허용한 것이다. 노동조합은 사용자와 노동자의 개별적인 관계를 집단적인 관계로 바꾸는 기제다. 우리나라 헌법 제33조에 보장된 노동자의 노동 3권은 노동조합을 통해 완성된다. 그런데 이런 노동자의 권리가 9월13일 노사정 합의로 심각하게 위협받을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번 노사정 합의는 노동자의 집단성을 흩트리고 개별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싶다. 노사정 합의문 곳곳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근로계약 해지와 취업규칙 변경에 관한 내용을 보자. 합의문에는 근로계약 해지의 기준과 절차를 명확히 하겠다고 명시돼 있지만 실상은 일반해고를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노동계는 저성과자가 주요 대상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나는 대상자 범위가 예상보다 클 수 있다고 본다. 주요 대상자는 바로 사무직이다. 대부분 기업은 인력 구조조정을 할 때 사무직에 대해서는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이때 기업은 별도의 퇴직금을 제시하면서 희망퇴직을 유도한다. 회사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2년치 연봉이 제시된다. 최근 희망퇴직을 받고 있는 회사에서 30년 이상 장기근속자에게 2억원의 명퇴금을 제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어느 금융회사는 자녀 학자금까지 제안했다. 1인당 이 정도 명퇴금을 주려면 아무리 못 잡아도 수백억 원의 구조조정 자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노사정 합의에 따르면 기업은 이런 명퇴금조차 아낄 수 있게 된다. 일반해고가 가능해지니 굳이 이런 돈까지 쓸 필요가 없다. 더구나 사무직은 노조 가입률이 낮아 저항력도 크지 않다. 정부와 경영계가 왜 그토록 근로계약 해지 조항을 고집했는지 감이 온다.

취업규칙 변경을 노조나 근로자 과반의 동의 없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발상 역시 노조의 집단적 힘을 무력화하겠다는 의도가 깔여 있다. 이렇듯 노사정 합의에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 집단적 관계를 차단하고 개별적 관계로 전환하면서 노사관계를 무력화하는 내용이 숨어 있다. 이건 정부와 경영계의 노림수였고 한국노총은 결과적으로 노림수에 말려든 셈이다.

꽃은 한데 어우러져 피울 때가 예쁘다. 노동자도 조직화할 때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노동자의 집단성을 훼손하는 조항은 막아야 한다. 막을 수 있는 무기는 노동자의 집단성뿐이다.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 (imksg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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