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임금체계는 배보다 배꼽이 큰 구조를 갖고 있다. 낮은 기본급과 복잡한 수당으로 대표되는 기형적인 체계다. 특히 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임금체계가 급속히 왜곡됐다. 유연화·효율화 논리가 노동시장을 휩쓸면서 성과급이 우후죽순 도입됐다. 연공급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

노사정과 학계는 지난 20여년간 변죽만 울렸을 뿐 임금체계 개편에 관한 바람직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진정성 있는 대화도 없었다. 최근 확산되는 통상임금 소송은 기형적이고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로잡지 못한 필연적인 결과다.

현재 임금체계 개편 흐름은 정부와 재계가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방향이 잘못된 듯하다. 비용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통상임금 소송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초점을 맞춰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이젠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꿔야 할 때다. 기본급을 올리고 복잡한 수당을 단순화해야 장시간 노동을 줄일 수 있다. 그래야 박근혜 정부가 바라 마지않는 ‘고용률 70%’ 달성도 가능할 것이다. <매일노동뉴스>가 바람직한 임금체계 개편을 기대하며 6회에 걸쳐 주요 쟁점과 논란을 짚어 본다.

<게재 순서>
① 임금체계 개편, 왜 실패했나
② 왜곡된 임금체계-생산직
③ 왜곡된 임금체계-사무직
④ 누구를 위한 통상임금 전쟁인가
⑤ 소송에 가려진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문제
⑥ 임금체계 개편의 바람직한 방향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사무직(연구직)으로 18년을 일한 신아무개(43)씨는 최근 동료 1천명 이상이 참여한 통상임금 반환소송에서 이겼다. 법원이 전년도 인사평가 결과에 따라 회사로부터 받아 온 업적연봉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보니 대법원에서도 이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단다.

신씨가 대법원에서 이길 경우 받는 업적연봉과 각종 수당차액은 1천만~1천500만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돈을 받으면 국악을 배우고 있는 초등학교 5학년 딸에게 전통악기를 사 줄 생각이라고 했다. 신씨는 “딸에게 뭔가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며 “소송에서 이길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지엠이 한국에 투자하기로 한 돈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신씨를 포함해 한국지엠 사무직 노동자 1천28명이 제기한 통상임금 반환소송에 대한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나온 지난달 26일. 한 포털사이트의 관련기사 댓글에 어느 누리꾼이 써 놓은 글이다.

댓글을 쓴 사람이 재계 관계자인지, 일반 시민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5월 대니얼 애커슨 지엠회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통상임금 문제 해결을 조건으로 8조원 투자를 언급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떼인 돈’을 돌려받겠다는 노동자들의 통상임금 반환소송에 대해 “기업의 투자기피와 영업손실을 가져온다”는 인식도 존재함을 보여 준다.
 

 


통상임금 전쟁의 축소판 한국지엠

지난해 3월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한국지엠에서는 통상임금 대리전이 펼쳐졌다. 노동자들은 떼인 임금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고 했고, 경영진은 돈을 추가로 지불하면 경영이 어려워진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지난해 3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사업장은 대구시 버스업체 금아리무진이었지만 정기상여금까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결을 먼저 이끌어 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들은 한국지엠 노동자들이었다.

한국지엠 전현직 노동자들이 제기한 통상임금 반환소송만 해도 9건이나 된다. 1·2심에서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이라는 판결이 나와 대법원 확정판결을 기다리는 소송과 해당 소송에 영향을 받아 1만600여명이 집단적으로 제기한 소송 등 생산직 노동자들이 낸 소송이 5건이다. 업적연봉과 개인연금보험료를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는 판결을 이끌어 낸 사무직 노동자들의 소송이 4건이다.

일국의 대통령까지 만나 한 국가의 대법원 판례에 도전장을 던진 사용자도 한국지엠 본사 회장이다. 한술 더 떠 한국지엠은 집단소송에서 패소할 것을 가정해 지난해 결산에서 8천억원을 부채상환을 위해 지출한 것으로 처리했다. 이에 따라 3천400억원의 영업이익 적자가 났다. 실제는 흑자인데 마치 통상임금 때문에 적자가 난 것처럼 꾸며 노동계와 정부를 압박한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통상임금 소송

노동계와 학계에 따르면 이달 현재 통상임금 반환소송을 진행 중인 사업장은 최소 100여곳에서 최대 160여곳에 이른다. 완성차업체와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같은 대규모 사업장도 있고, 버스회사와 같은 중소기업도 있다.

통상임금 산입범위가 커지면서 소송을 제기하는 노동자나 사업장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최근에는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근로복지공단, 지방공기업인 서울메트로·서울도시철도공사와 카지노업체인 강원랜드·파라다이스 노동자들이 소송을 제기했거나 추진하고 있다. 제조업·운수업 중심에서 공공기관·서비스업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통상임금 소송이 잇따르는 것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법원 판결이 이어지면서 생긴 ‘우리도 하면 이긴다’는 분위기와 일부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발생한 노조 간 경쟁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소송만이 능사일까

한편에서는 묻지마식으로 소송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통상임금 논란이 불거진 것은 복잡한 임금체계 때문인데도 이에 대한 해결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체불임금 돌려받기에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기본급과 고정급 비중이 낮은 우리나라 임금체계가 초래한 가장 큰 문제는 장시간 노동이다. 통상임금 비중이 낮은 임금체계는 사용자들이 장시간 노동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에게 값싼 돈으로 연장근로를 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편이기도 하다. 실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측면에서 기본급 확대나 임금체계 단순화가 중요한 이유다.

통상임금 소송이 양극화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 실제 노동자들의 소송능력과 회사의 지불능력에서 차이를 보인다. 노동계의 다수 상급단체가 “소송은 사용자가 체불임금 반환을 거부할 경우에 한해 진행하고, 단체협상을 통해 통상임금이나 고정급 범위를 넓히고 노동시간단축을 추진하라”는 지침을 내린 배경이다.

소송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일부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지난해 2월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던 금아리무진 노동자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소송 당사자들이나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좋아졌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소송에 참여한 19명의 노동자들은 2005~2007년치 미지급 수당을 받았다. 그런데 회사측은 소송이 끝나자마자 교섭대표권을 가진 다른 복수노조와 상여금을 기본급에 편입시키는 대신 호봉체계 구간을 늘리기로 합의했다. 회사는 특히 소송참여자를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에게 2009~2012년 미지급 수당의 85%만 지급하고, “향후 통상임금 등과 관련한 일체의 문제제기나 소송을 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받아 냈다.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을 받았지만 임금인상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19명의 노동자들은 2009~2012년치 미지급 수당을 받기 위해 다시 소송을 제기해야 했다.

금아리무진 사건을 담당한 민주노총 울산법률원의 이선이 공인노무사는 “소송도 중요하지만 소송 결과를 임금체계에 반영해 실질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기본급 늘리고, 시간 줄이는 '두 마리 토끼' 잡은 사례도

단체협약 체결을 통해 기본급 확대와 노동시간단축에 성공한 경우도 있다.

민주연합노조는 2011년 12월 강릉시·속초시·삼척시·속초시시설관리공단과 교섭을 통해 상여금을 포함한 각종 고정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기로 합의했다. 대신 법원 판결에 따라 사용자가 지급해야 할 각종 수당차액 중 일부를 차감해 줬다. 노조는 1차 통상임금 반환소송에서 교통비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킨다는 법원 판결을 이끌어 낸 뒤 상여금도 소송대상에 포함시킬 예정이었다.

노사합의에 따라 조합원들의 연평균 급여가 300만원~500만원이 올랐다. 그때부터 사용자들은 연장근로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통상임금 비중이 높아지면서 덩달아 올라간 시간외근로수당 지급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시간외근로수당을 기본급에 포함시킨 뒤 연장근로를 아예 없애 버린 사례도 있다. 민주연합노조는 2011년 나주시·영암군과 월 25시간의 시간외근로수당을 기본급으로 전환하고 연장근로를 폐지하는 데 합의했다. 김인수 노조 정책국장은 "급여수준이 높지 않은 환경미화 노동자들 입장에서 연장근로가 없다는 것이 아쉬울 수도 있다"면서도 "기본급을 확대하고 노동시간을 줄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합의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중소·영세 노동자나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기본급 인상을 유력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복잡한 임금체계가 해소되고 기본급이 확대되면 고임금 노동자와 저임금 노동자 간 비교가 쉬워진다”며 “자연스럽게 최저임금 인상 논의도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재계, 해결사 자처한 정부

재계는 노동계의 잇단 소송에 대해 “자기들이 각종 수당 신설에 합의해 놓고 이제 와서 소송을 제기해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판한다. 그렇다고 해서 재계가 노동계의 통상임금 반환소송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금아리무진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각종 고정수당과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은 대세가 됐다. 이를 고려해 노동계는 소송에 앞서 단체협상에서 통상임금 범위 확대나 기본급 확대를 요구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용자들은 대법원 판례에 근거해 협상을 하기보다는 근로기준법상 지연이자라도 깎아 볼 심산으로 노조의 요구를 거부했다. 소송으로 가는 것이 한 푼이라도 깎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상임금을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바라본 일부 로펌의 행태도 소송을 조장했다. 사용자들이 법률자문을 해 오면 소송에서 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몇 푼이라도 깎아 주겠다”며 사용자들을 부추긴 로펌이 적지 않았다.

정부 책임도 크다. 복리후생비에 해당하는 각종 수당을 비롯해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전부 노동의 대가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이미 95년에 나왔다. 그 뒤 법원은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지급되는 수당 대부분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지난해 3월에는 대법원이 금아리무진 노동자 사건에서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이라고 판결했다. 이어 서울고등법원은 같은해 11월 한국지엠 노동자 소송에서 같은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도 노동부는 1988년 제정(2009년 9월 폐지 후 재발령)한 통상임금 산정지침에 법원 판례를 반영하지 않았다. “생활보조적·복리후생적으로, 실제 근로 여부에 따라, 1개월 이내의 단위를 벗어나 지급되는 금품은 통상임금이 아니다”는 해석을 25년간 유지한 것이다.

그랬던 정부가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지엠 회장을 만나 통상임금 관련 얘기를 나누자 기다렸다는 듯이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임금체계를 바꾸겠다면서 임금제도개선위원회를 만든 것이다.

김형동 변호사(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는 “노동부가 마치 임금제도개선위원회나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수 있다는 듯이 호도하는 바람에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 되겠다’고 판단한 노조들이 소송전에 뛰어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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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아차, 수조원대 '통상임금 전쟁'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에서 통상임금 전쟁이 불붙고 있다.

6일 노사에 따르면 23명의 노동자가 대표소송을 진행 중인 현대차의 경우 지난달 23일 2차 변론까지 마쳤다. 정확한 소송 청구금액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가 어림잡아 계산한 결과 1인당 6천100만원 정도다. 그것도 지연이자와 소급분 등을 제외하고, 정기상여금 등이 포함된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돌려받게 되는 각종 수당 차액만 계산한 것이다. 소송에서 이겼다는 가정하에 조합원 4만3천명에 해당 금액을 적용하면 총액이 2조6천억원이나 된다. 지부 관계자는 “소송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대심리가 높아 청구가액을 밝히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기아차는 2011년 7월 2만8천명이 각종 고정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라는 집단소송을 제기했다가 지난해 9월부터 고정상여금에 대해 28명의 노동자가 대표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차와 청구액이 비슷하다. 기아차지부는 순수하게 시간외근무수당 등의 차액을 기준으로 하면 1인당 6천여만원, 지연이자와 소급분 등을 포함시키면 1인당 8천여만원 정도를 돌려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기아차지부의 예상 청구액을 합치면 4조원에 육박한다. 현대·기아차 사측은 대표소송에서 질 경우 순수 반환비용에 지연이자, 퇴직급여 중간정산자에 대한 추가 퇴직급여 지급, 4대 보험 추가 납부비용까지 합치면 7조~8조원에 이르는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소송규모가 크다 보니 노조와 사용자 간 눈치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현대차의 경우 지난달 울산지법에서 열린 2차 변론에서 청구금액을 산출하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자료를 방대한 분량의 문서로 제출했다. 당초 법원은 빠른 사건처리를 위해 엑셀파일로 제출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를 모른 체한 것이다. 현대차지부는 “변론 10분 전에 기습적으로 제출해 우리쪽 변호인단과 법원의 사전검토 시간을 빼앗았다”며 “통상임금 논쟁에 정부가 (임금체계를 바꾸려고) 개입하니까 사용자도 시간 끌기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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