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임금체계는 배보다 배꼽이 큰 구조를 갖고 있다. 낮은 기본급과 복잡한 수당으로 대표되는 기형적인 체계다. 특히 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임금체계가 급속히 왜곡됐다. 유연화·효율화 논리가 노동시장을 휩쓸면서 성과급이 우후죽순 도입됐다. 연공급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

노사정과 학계는 지난 20여년간 변죽만 울렸을 뿐 임금체계 개편에 관한

바람직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진정성 있는 대화도 없었다. 최근 확산되는 통상임금 소송은 기형적이고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로잡지 못한 필연적인 결과다.

현재 임금체계 개편 흐름은 정부와 재계가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방향이 잘못된 듯하다. 비용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통상임금 소송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초점을 맞춰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이젠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꿔야 할 때다. 기본급을 올리고 복잡한 수당을 단순화해야 장시간 노동을 줄일 수 있다. 그래야 박근혜 정부가 바라 마지않는 ‘고용률 70%’ 달성도 가능할 것이다. <매일노동뉴스>가 바람직한 임금체계 개편을 기대하며 6회에 걸쳐 주요 쟁점과 논란을 짚어 본다.

<게재 순서>
① 임금체계 개편, 왜 실패했나
② 왜곡된 임금체계-생산직
③ 왜곡된 임금체계-사무직
④ 누구를 위한 통상임금 전쟁인가
⑤ 소송에 가려진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문제
⑥ 임금체계 개편의 바람직한 방향

“이거 괜히 공개했다가 귀족이네 뭐네 욕이나 먹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만 써 주세요.”

A대기업 생산직 노동자 김병만(47·가명)씨가 4일 <매일노동뉴스>에 자신의 월급명세서를 공개하며 신신당부한 말이다. 올해로 입사 23년차인 그는 지난해 4월의 명세서를 보내왔다. 잔업·특근을 가장 많이 한 데다, 분기별로 나오는 자녀학자금과 연간 750%가 분할 지급되는 상여금이 포함된 달의 명세서다. 쉽게 말해 월급을 제일 많이 받은 달의 명세서다.

먼저 눈이 간 곳은 단연 실제 지급액. 김씨는 이달 사회보험료와 조합비·단체개인연금 등을 공제하고 709만7천330원을 받았다.<표1 참조>

 


김씨가 매달 이렇게 많은 돈을 월급으로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자녀학자금과 상여금이 나오지 않는 달의 실지급액은 350만원 정도다. 지난해 통계청이 내놓은 우리나라 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이 211만3천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어찌 됐든 그의 임금 수준이 상당히 높은 축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씨의 명세서는 ‘배보다 배꼽이 큰’ 우리나라 제조업 임금체계의 전형을 보여 준다. 192만2천400원의 기본급과 12개의 제 수당, 연장·야간·특근수당과 자녀학자금·정기상여금 등을 받았다. 기본급 비중이 낮고, 근속수당을 비롯한 제 수당과 잔업·특근수당 같은 변동급여의 비중이 높다.

명세서의 하이라이트는 연장·야간·특근수당이다.<표2 참조>

 


김씨는 평일정취 205시간·야간정취 35시간·평일연장 55.29시간·평일심야 17.5시간·휴일정취 64시간·휴일연장 31.5시간·휴일심야 14시간을 일했다. 총 노동시간은 422.29시간. 이를 한 달(30일)로 나누면 매일 14.07시간씩 일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말 그대로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다.

김씨는 “특근을 일곱 번이나 뛰었다”고 말했다. 정상근무 외에 연장근무와 휴일근무에 대한 할증에 할증이 붙어 시급을 기준으로 한 순수한 노동의 대가는 478만1천643원(각종 공제 전)으로 집계됐다. ‘몸 팔아 돈 번다’는 제조업 노동자들의 하소연은 괜한 엄살이 아니다. 시급을 기준으로 설계된 임금체계는 제조업 노동자들을 ‘많이 일하면 더 번다’는 장시간 노동의 덫에 빠뜨렸다.

임금총액 보고 놀라고, 노동시간 보고 더 놀라고

배보다 배꼽이 큰 제조업의 기형적인 임금체계는 올해 가장 주요한 노동이슈 가운데 하나인 통상임금 논쟁의 근본 배경을 이룬다. 통상임금 논쟁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니얼 애커슨 미국 지엠 본사 회장이 통상임금 문제 해결을 전제로 80억달러 투자계획을 밝히면서 시작됐다. 박 대통령과 수행단이 애커슨 회장의 요구에 긍정적 시그널을 보내면서 통상임금 문제는 최대 노동현안으로 떠올랐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통상임금은 연장·야간·휴일근로에 대해 지급해야 할 가산임금의 산정기초가 된다. 이 밖에 해고예고수당이나 연차유급휴가수당도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통상임금은 평균임금과 퇴직금·산업재해보상금에도 영향을 준다.

현재 법원은 이미 정해진 금액(고정적)을, 일정한 기간(정기적)마다, 해당 노동자에게 일괄(일률적) 지급할 경우 임금의 명칭과 지급기간을 불문하고 통상임금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김씨의 명세서에 열거된 제 수당은 물론이고 정기상여금과 자녀학자금까지 통상임금으로 판단될 여지가 크다.

실제 A사 노사는 현재 통상임금 산입범위를 놓고 대표소송을 벌이고 있다. 노사는 소송 결과가 나오면 법원의 판단에 따라 임금체계를 개편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막대한 금전이 걸린 A사의 매머드급 소송에 노동계와 재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법원의 판례가 지금까지의 흐름을 유지한다면 A사의 통상임금 소송은 노동자들의 승소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본급이 적고 변동급이 많은 왜곡된 임금체계가 유지돼 온 이유는 단순하다. 기업은 기본급 인상을 최대한 자제하는 방식으로 각종 가산임금과 퇴직금을 줄여 왔고, 노조는 기본급을 올리는 힘든 투쟁 대신 수당 늘리기라는 손쉬운 길을 택한 결과다.

기업들은 정기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킬 경우 천문학적인 비용부담이 발생한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은 14조6천억~21조9천억원, 한국경총은 38조5천억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한다고 추정한 바 있다.

지금의 임금체계가 노사합의 내지는 노사담합 구조에서 형성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영계의 불만도 일리가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국내기업 500곳을 대상으로 ‘통상임금 문제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결과 응답기업의 56%가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하면 지급해야 할 임금차액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기업들은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면 인건비가 평균 15.6% 올라갈 것으로 예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가 취해야 할 다음 행보는 사실상 정해져 있다. 임금체계 단순화다. 법원이 통상임금의 범위를 넓게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사 모두 지금의 복잡한 수당체계를 고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임금에 거품이 있다면, 그 거품을 제거하는 일 역시 임금체계 개편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대한상의 조사에서도 응답기업의 61.3%가 통상임금 문제 대처방안으로 ‘임금체계 개편’을 꼽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산물 '호봉제'

김씨가 받는 임금의 또 다른 특징은 근속연수가 쌓일수록 임금이 오르는 연공급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호봉제로 불리는 임금체계다.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호봉제가 본격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우리나라에는 60년대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기승급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국내기업들이 일본의 인사제도를 모방하면서부터다. 80년대 초반 한국경총이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90%가 넘는 기업이 호봉승급제도를 운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봉제는 사무직의 전유물이었다. 생산직 노동자에게는 단순 일당만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노총이 80년대 초반 산하노조 228곳의 단체협약을 분석한 결과 승진·승급기간을 명시한 단협은 전체의 21.9%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제조업 생산직까지 호봉제가 확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물론 인사고과가 반영되지 않는 연공급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정년까지 호봉승급이 계속되는 사업체의 비중이 증가하고, 노동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대다수 사업체에서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차등승급 관행을 폐지하고 일률적인 자동승급제를 도입했다. 직능보다는 근속연수를 중요시하는 임금체계의 강한 연공성은 87년 이후 국내기업의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내부노동시장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연공급은 경제성장 시기에 숙련인력을 기업에 오래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노조도 연공급이 임금에 대한 성과의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제도로 받아들였다.

특히 교육비와 주택자금·자녀의 결혼비용 같은 목돈을 지출해야 하는 40~50대에게 연공급은 연령과 함께 증가하는 생계비를 충당하는 ‘생애주기형’ 임금체계로 기능했다. 이문호 워크인연구소 소장은 “복지제도가 미흡한 우리나라에서 고령노동자가 자녀의 교육과 결혼·주택구입에 지불한 돈은 ‘가족이 부담한 사회투자’로 봐야 한다”며 “복지제도가 취약한 국가일수록 연공급제의 순기능이 크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호봉제 부여안고' 딜레마 빠진 노동계

하지만 이러한 연공급의 영광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97~98년 외환위기 이후 성과연동 임금체계가 확산되면서 호봉제의 자리를 연봉제가 대신하기 시작했다. 1년 이내로 고용계약을 갱신하는 비정규직이 늘면서 호봉제를 적용받는 노동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더구나 2016년 정년 60세 시행을 앞둔 상황에서 임금피크제나 성과연동임금을 확대하라는 재계의 요구가 전면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고용노동부와 전문가들이 중심이 돼 운영되는 임금제도개선위원회나 지난 10여년간 계속적으로 진행돼 온 임금체계 개편논의도 따지고 보면 연공급제의 완만한 해체를 위한 연착륙 노선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년연장과 함께 임금피크제 같은 임금조정을 병행해야 한다는 경제계의 주장은 “그 돈이면 젊은 애들 세 명을 쓸 수 있다”는 말로 요약된다. 근속연수가 길수록 임금과 생산성의 격차가 벌어지는 연공급 임금체계가 되레 고령자들의 고용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연공급과 정년연장의 상관관계를 따지는 대부분의 연구는 임금연공성이 높은 기업일수록 정년이 낮아진다는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연공급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는 노동계 안팎에서도 나온다. 실제 우리 사회에는 연공급을 적용받지 않는 노동자층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비정규직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연공급은 연대의 원리에 입각해 노동운동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산물로 제조업 생산직들에게 도입된 연공급은 26년이 지난 지금 고임금 노동자의 갑옷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목에서 노동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지 오래다. 적극적으로 연공급제를 옹호하자니 노동운동의 원칙이 마음에 걸리고, 기득권을 포기하자니 노동운동의 후퇴를 인정하는 꼴이다. 노동계의 이 같은 어정쩡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막아 내지 못했다. 노동계의 “연봉제 반대” 외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연봉제 도입기업은 급증했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구호는 임금의 양극화라는 현실 앞에 무기력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노동시장 전문가는 “노동계가 스스로 임금전략의 부재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거나 ‘최대한 버티면 그만’이라는 식의 안일한 사고에 젖어 있는 것 같다”며 “노동계가 장시간 노동 개선과 연대임금 실현을 위한 임금체계 설계라는 당면과제를 언제까지 외면할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기업 내부에서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소수에게 부가 편중되고, 내수 진작이나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지 않는 돈들이 재벌의 곳간에 쌓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사내유보금에서 현금성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 봐야겠지만, 대기업들의 수익이 투자와 분배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고용노동부의 ‘2012년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정규직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평균 1만6천403원, 특수고용직을 제외한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은 1만437원으로 집계됐다.

또 노동부가 농업을 제외한 1인 이상 사업체 2만8천곳을 표본조사한 ‘2013년 6월 사업체노동력조사’ 결과에 따르면 5월 기준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노동자 1인당 월평균 임금총액은 287만7천원이다. 정액급여와 초과급여·특별급여가 포함된 액수다. 이를 연봉으로 환산하면 3천452만4천원이다. 정규직 200명의 연봉을 합쳐야 A사 회장 한 사람의 연봉과 비슷해진다. 정규직 평균임금을 지급한다고 가정하면 A사의 사내유보금으로 고용 가능한 인원은 97만3천236명이다.

하루 14시간을 일하고 연봉 7천만원을 받는 김씨와 69억원의 연봉을 받으면서 막대한 사내유보금까지 보유한 A사 회장 중 진짜 ‘귀족’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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