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에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기사가 넘쳐난다.
조선일보는 4월27일자 10면에 60대 여성을 불러내 6·25를 되짚었다. 이 여성은 7살 때 “아버지가 사지(死地)의 전쟁터로 떠나는 줄도 모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신나게 전송가를 불렀던” 슬픈 기억을 안고 살았다. 당시 철모르고 목청 좋게 불렀던 노래는 <승리의 노래>다.

“무찌르자 침략자 … 맹호 같은 용사들 총검을 들고” 같은 섬뜩한 노랫말은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모더니즘 시인 김광섭이 지었다. 시인은 1941년까지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해 일본 경찰에 잡혀 무려 3년8개월이나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던 김광섭은 해방 후 미군정청 공무국장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의 경무대 공보실장을 지내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김광섭은 7살의 어린 아이에게 죽음의 전장으로 나가는 아버지 앞에서 한껏 소리 높여 부를 <승리의 노래>를 선물했다.

음악과 권력의 공생관계는 역사가 길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1930년대 유럽 백성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히틀러는 침략 대상국가에 군대보다 먼저 베를린 필하모닉을 보냈다. 프르트 벵글러의 지휘로 베를린 필하모닉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나면 다음날 여지없이 나치 부대의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은 나치가 보내는 침략의 전령사로 악명이 높았다.

교향악의 아버지 하이든은 179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왕이던 프란츠 1세의 생일에 맞춰 <황제 찬가>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게르만 민족우월주의에 젖은 독일 국가를 표상했다.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너지자 오스트리아는 이 곡에 가사만 바꿔 1946년까지 국가로 불렀다.

반항아 모차르트는 1787년 <돈 조반니>를 작곡하면서 귀족들의 악습과 무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극 중에 시민계급을 단 한 명도 등장시키지 않았다. 자기에게 밥을 주는 국왕을 불편하게 하기 싫어서였다. 모차르트는 대중가요처럼 개혁을 꿈꾸는 시민계급의 이상을 연주했지만 동시에 지체 높은 자들의 수요에도 열심히 부응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 <마술피리>에 와서야 비로소 시민사회의 이상향에 가장 근접한 곡을 만들었다.

1849년 독일 드레스덴 민중봉기에서 바리케이드 위에서 싸웠던 리하르트 바그너는 미하일 바쿠닌과 함께 배후로 지목받아 스위스로 망명을 떠난 진보파 음악가의 상징이다. 그러나 혁명 음악가 바그너는 얼마 후 국가의 충복으로 전향했다. 이후 바그너는 게르만 민족주의에 젖어 반유대주의로 급선회했다. 바그너의 변신은 그를 작센의 궁정악장으로 만들어 줬다. 바그너는 유대인과 혁명 프랑스에 대한 증오가 병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바그너는 <음악에서의 유대교>라는 논문까지 내면서 “유대인은 페스트나 다름없는 놈들”이라고 비난했다.

권력도 집요하게 음악을 이용했다. 나치 당가였다가 히틀러 시절 독일 국가의 반열에 올랐던 <깃발을 높이 올려라>라는 노래를 지은 작곡가 호르스트 베셀은 원래 매춘부 에르나 야에니케의 기둥서방이었다. 베셀은 1930년 에르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또 다른 포주에게 총 맞아 죽었다. 나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치의 문화부장관 괴벨스는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된 베셀의 죽음을 공산주의자에게 기습당한 것으로 조작해 민족사회주의의 순교자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줬다.

동서냉전의 절정기에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가 1968년 칸타타 <메두사의 뗏목>을 함부르크에서 연주하기 직전 이 작품을 볼리비아에서 죽은 체 게바라에게 헌정한다고 하자 독일 정부와 우익은 격렬하게 그를 비난했다. 항의는 극에 달해 초연은 결국 중간에 중단됐다. 우익 청년시위대가 체 게바라의 사진이 걸린 지휘대로 돌진해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헨체 같은 진보주의 작곡가들은 유럽에서 보수집단과 늘 대립했다. 전후 독일 세대인 보수파가 주도하는 음악계의 성향은 히틀러 시대에 만든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갔다.

음악과 권력의 공생관계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음악에 재정을 지원하는 주체가 귀족 후원자에서 재벌로 바뀌었을 뿐이다. 어디 음악뿐이랴. 문화 일반이 다 그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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