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에 항거했던 정치학자 양호민 전 서울대 교수가 지난 17일 항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주 대다수 언론이 그를 ‘선생님’이라 호칭하면서 죽음을 애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인 65년 5월 저명한 대학교수 15명을 경제개발계획평가위원으로 위촉해 이른바 ‘평가교수단’을 발족했다. 정부는 이들에게 충분한 거마비를 주는 혜택을 베풀었다. 해외여행을 엄히 규제하던 당시, 평가교수들은 1년 평균 서너 번씩 여행을 다녔다.

평가교수들이 곡학아세로 특혜를 받을 때 구석에선 양심적 교수들이 ‘정치교수’라는 오명을 쓰고 대학에서 쫓겨났다. 양호민 당시 서울대 교수도 김성식·이항녕·조윤제 등과 함께 65년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한 범국민운동에 동참했다. 결국 체결을 강행한 정부에 항의해 교수직을 버렸다.

양호민은 박정희 정권과 끈질기게 싸우다 간 장준하 선생이 만든 <사상계>의 단골 논객이었다. 양호민은 61년 5월부터 4년5개월 동안 사상계의 주간이었다. 사상계 최장기간 주간 기록이다. 쿠데타 초기 비판언론의 편집책임자로 보내는 건 결코 녹록지 않은 세월이었다. 63년 3월16일 박정희 장군이 민정이양 약속을 뒤집고 “군정을 4년간 더 연장한다”고 발표하자 양호민 주간은 편집을 다 끝낸 사상계 4월호를 밀어 버리고 ‘군정반대 특집호’로 재편집했다. 함석헌의 ‘민중이 정부를 다스려야 한다’와 신상초의 ‘한국은 민국이다. 군정연장은 국가적 비극’ 등 주옥같은 글을 담았다.

양호민과 장준하는 사상계를 고리로 끈끈한 관계를 맺었다. 잡지 사상계는 53년 4월 전쟁 통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첫 호부터 양호민은 필자로 등장한다. 드니 드 루슈몽의 ‘자유의 내성’을 번역했다. 양호민은 사상계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안병욱 선생은 집을 저당 잡혔고 집이 없던 나는 장인의 집문서로 은행대출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양호민은 “65년 11월 나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갔다. 이때까지 사상계 표면에 나의 직책이 나타났다 없어졌다 한 것은 장준하 선생이 나를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회상했다.

양호민은 군사정권 시절 드물게 북한을 연구했다. 세인들은 그를 “사회민주주의자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불렀다. 전두환 정권 때 공동집필한 ‘북한사회의 재인식’(한울·1987) 서문에서 "(북한) 원전에 대한 풍부한 인용과 예증을 들어가면서 그것을 반박하고 다른 한편 그런 이론이 구축된 내부적 사정과 불가피성을 설명한다. 그런 이론이 지난 40년간 북한사회의 현실에 관철돼 어떤 식으로 현실을 개조시켜 왔는지를 사실적으로 분석했다"고 썼다. 적어도 ‘때려잡자 공산당’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65년 11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간 양호민은 84년까지 조선일보 식구로 지냈다. 조선일보를 나와 두 번째 미국행에서 귀국한 뒤 88년 노태우 정권 밑에서 KBS 이사를 잠시 지냈다.

양호민의 반전은 여기서부터였다. 절치부심하던 양호민은 89년 <한국논단>을 만들어 초대 사장을 지낸다. 한국논단은 창간의 이유를 “6·29 선언 이래 봇물처럼 터진 욕구불만이 오히려 민주적 질서를 파괴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혼돈과 가치의 전도를 초래함에 민주적 법질서의 회복과 바른 사회가치관의 정립이라는 절박한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배우 문근영을 ‘좌익 빨갱이’이라 비난했던 지만원도 한국논단의 주요 필진이었다. 고건 서울시장 때까지 서울시정개발위원을 지내며 지금의 민주당 주위를 맴돌았던 지만원은 한국논단 2000년 2월호에 “김대중 정권, 적과의 내통을 의심한다”는 글을 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양호민의 반전의 근원은 어디였을까. 양호민이 사상계에 쓴 글을 되짚는 건 짧은 지면으로 불가능하다. 세인들이 그를 진보적 지식인으로 부르던 81년에 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론>이란 논문을 보자. “(북한은) 자기의 노선에 비판하면 반당 반혁명분자요 반사회주의적이요 계급의 적이라고 낙인찍는다. 김일성의 민주주의론은 객관적이고 실증분석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다. 결론은 김일성의 일당독재-일인독재체제의 영속화를 합리화하려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여느 반공주의자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70~80년대 이런 사람을 진보적 지식인으로 불렀다. 세인들이 지식인의 글을 읽지 않고 지식인의 입만 쳐다볼 때 ‘우리 안의 양호민’도 함께 자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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