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건복지가족부와 기획재정부가 영리병원(투자개방형 의료법인) 도입 필요성에 대한 연구 용역 결과를 발표했다. 영리병원 도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보건산업진흥원은 영리병원을 도입하더라도 공공의료를 강화해야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고, 지역거점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과 적십자병원은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지역거점 공공병원에 대한 내년 지원예산을 절반으로 삭감했다.
서민과 취약계층이 그나마 병원의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은 공공병원이다. 신종인플루엔자가 대유행했을 때도 가장 먼저 환자를 받은 곳은 지방의료원과 적십자병원이었다. 공공병원들이 회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김수남(가명·61)씨는 알코올성 치매환자다. 경기도립의료원 수원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지난 5월 경기도립의료원 의정부병원(의정부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치매 증상이 심해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김씨는 밤마다 소리를 질러 주위에 있는 환자들이 불편을 호소한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그는 병원에서 고용한 간병인이 돌봐주고 있다. 의정부의료원은 보호자 없는 환자들을 위해 공동간병인을 고용하고 환자들로부터 하루 2만원을 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간병인을 고용하면 하루 6만~7만원을 부담해야 한다. 김씨의 간병비는 물론 기저귀 등 생필품도 모두 의료원이 부담하고 있다.
의료원은 얼마 전 수소문 끝에 그에게 부인과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의료원의 연락을 받은 가족들은 “이미 떨어져 산 지 10년이 넘었다”며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답했다. 요양시설로 보내졌던 김씨는 시설에서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하루 만에 다시 의료원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를 돌봐줄 곳은 의료원뿐이다.

취약계층에 문턱 낮은 지방의료원

지난 23일 찾아간 의정부의료원의 가정의학과 병동 입원환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의료급여수급권자다.
보건복지가족부에 따르면 지역거점 공공병원의 전체 환자 가운데 의료급여 환자는 27.8%로 민간병원(16.6%)보다 높다. 특히 입원 환자의 41.8%는 의료급여 환자다. 민간병원의 의료급여 입원 환자 비율은 13.2%에 불과하다.

이날 병원에서 만난 이문원(62)씨는 지방의료원을 찾는 이유에 대해 “다른 병원은 요구하는 게 너무 많아서”라고 말했다. 입원을 하려고 민간병원을 찾아가면 의료급여환자는 이것저것 떼오라는 서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절차가 복잡하다 보니 조건을 따지지 않고 환자를 받아주는 공공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김수남씨처럼 치매환자인데다가 보호자까지 없는 환자들이 민간병원에 입원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일부 병원에서는 일반 건강보험 환자이고, 신분이 분명해도 보호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입원을 시켜 주지 않고 있다.

공익기능 수행하다 만성 적자

지방의료원이 공익적 기능에 충실하다 보니 적자는 불가피하다. 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의료급여 환자에 대한 의료수가는 일반 건강보험 환자 대비 72~75%로 낮다. 지역거점 공공병원의 평균진료비도 민간병원 대비 65~88%로 낮은 편이다. 서민과 취약계층이 주로 찾다 보니 비급여 진료나 과잉진료를 자제하는 것이다. 민간병원의 경우 100병상당 진료수익이 평균 80억원인 반면 지역거점 공공병원은 59억원이다. 이들 병원들은 서민층과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만성질환관리나 검진도 실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난해 기준 전국 34개 지방의료원 가운데 29개 의료원이 모두 414억원의 적자를 봤다. 6개 적십자병원 가운데 4개 병원에서 총 36억원의 적자가 발생했다. 40개 지역거점 공공병원 누적적자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5천387억원에 달한다. 병원당 135억원의 적자를 떠안고 있는 것이다. 누적 적자는 시설과 장비를 확충하기 위해 차입한 고정부채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이다. 낮은 진료 수익도 적자를 메우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적자는 알아서 해결하라?

지역거점 공공병원의 딜레마는 공익기능은 수행하되 적자는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책임경영제’다. 공공성을 확대하자니 적자 폭은 늘어나고 적자를 줄이자니 환자들을 상대로 과잉진료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의정부의료원 관계자는 “의료원이 치료를 넘어 복지시설 역할까지 하는데 재정부담은 모두 의료원이 떠안고 있다”며 “민간병원들은 수익을 좇아 경쟁하는데 공공병원은 도산할 위기에 놓여있다”고 우려했다.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다 적자를 보고 있는데도 정부는 해당 병원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복지부 주관으로 열린 ‘지방거점 공공병원 발전계획’ 공청회에서 복지부는 “선택과 집중에 의한 국고 지원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손영래 복지부 공공의료과장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지역거점 공공병원에 대한 국고지원을 일률적으로 여러 곳에 하다보니 효과가 반감됐다”며 “경영개선 성과를 반영해 우수의료원에 대한 지원을 먼저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경영수지 개선에 도움이 되는 부대사업과 경제성이 큰 사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결국 공공병원도 수익성이 되는 사업을 우선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쉬울 땐 먼저 찾는 공공병원

하지만 정부도 아쉬울 때면 가장 먼저 공공병원을 찾는다. 올해 유행한 신종플루가 대표적인 사례다. 신종플루 사태 초기 민간병원들은 환자 기피현상을 보였다. 확진환자를 지방의료원으로 보내기도 했다.

격리병동이 따로 없었던 의료원들은 갑자기 몰리는 신종플루 환자들을 위해 건물 한 층을 비워야 했다. 일반 환자를 받지 못해 발생한 손해는 고스란히 의료원들이 부담했다. 신종플루 환자가 몰리면서 감염을 우려한 일반 환자들이 발길을 돌렸고, 진료 수익은 뚝 떨어졌다.

인천공항과 근접한 인천의료원의 경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신종플루 환자를 치료했다. 이달 17일까지 신종플루 입원환자는 520명, 8월 말부터 이달 17일까지 외래환자는 5천460명에 달한다. 지난 사스때도 확인된 사실이지만 신종플루 사태를 겪으면서 취약한 공공의료의 현실은 여실히 드러났다. 지역거점 공공병원이 전국에 40개에 불과한 것을 비롯해 음압시설(공기압 차이를 이용해 내부공기의 외부유출을 막는 시설)을 제대로 갖춘 곳이 거의 없었다.

의사는 떠나고 예산은 삭감되고

만성적인 유행병이 확산되면서 공공병원의 역할이 커졌지만 정작 병원은 인력부족에 시달린다. 임금체불과 노동강도 강화는 소신 있는 의사와 간호사를 떠나게 하고 있다. 월급날이 지나면 지부사무실들은 조합원들의 ‘민원 집합소’가 된다. 의정부의료원의 경우 월급을 한 달에 2~3차례에 걸쳐 나눠 준 지 오래됐다.
높은 수준의 임금을 줄 수 없어 의사들도 병원을 떠나고 있다. 오랜 기간 임금체불에 시달리고 있는 대구적십자병원은 빠져나간 의사가 충원되지 않아 현재 전문의가 2명밖에 없다. 그나마도 40개 병원 전체 전문의(803명) 가운데 26%(209명)는 공중보건전문의다. 우수의료진을 확보하기 어려워 의료의 질이 저하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건축한 지 오래된 병원시설도 심각한 문제다. 40개 지역거점 공공병원 가운데 28개(70%) 병원이 건축된 지 20년이 넘었다. 시설이나 장비가 낙후돼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정부는 내년 예산까지 대폭 삭감했다. 지역거점병원 공공성 강화 사업예산으로 복지부가 책정했던 539억원을 기획재정부가 259억원으로 삭감했다. 최근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611억원으로 증액했고, 현재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상정됐다. 공공성 강화 예산은 대부분 시설 증개축·개보수에 사용된다.


지역거점의료기관 지정 법률안 발의

최근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의료기관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공공의료기관수는 2005년 6.8%에서 지난해 6.3%로 떨어졌고, 병상은 같은 기간 13.4%에서 11.1%로 줄어들었다. 남아 있는 공공병원들은 도산위기에 놓여 있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공공의료의 마지노선이 무너질 상황인 것이다.

더군다나 정부가 경영 개선 성과를 기준으로 국고를 지원하면 공공병원 사이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정백근 경상대 의대 교수(예방의학)는 “경영성과가 좋거나 평가를 잘 받는 병원은 자원도 많고 기존 인프라나 노하우가 있을 확률이 높다”며 “공공병원 사이에 편차가 큰데 결국 낙후된 병원은 고사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경영상태 개선만 평가하면 공공병원들은 수익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혜숙 민주당 의원은 정부의 수익성 추구 방침에 반대하는 대표적 의원이다. 전 의원은 지난 8월 ‘지역거점의료기관 지정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현존하는 병원급 이상의 공공의료기관과 공익적 보건의료사업을 시행하려는 병원급 이상의 민간의료기관을 지역거점의료기관으로 지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조·지원해 공익적 보건의료서비스를 하자는 것이다.

전혜숙 의원은 “현재 우리나라는 공공보건의료 기반이 취약해 만성질환과 응급환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가가 지역거점의료기관을 지원해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포괄수가제·보호자 없는 병원

또 보건의료노조는 환자 보호자의 간병 부담을 줄이고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내년 ‘보호자 없는 병원’ 시범사업 예산 확보를 요구하고 있다.
지방의료원의 경우 보호자가 없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이 사업에 대한 수요가 높은 편이다.

적자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질환별로 진료비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포괄수가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김형식 노조 정책기획실장은 “저소득층이 많이 이용하는 공공병원은 민간병원에 비해 과잉진료가 적어 포괄수가제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며 “포괄수가제가 공공병원에 정착되면 다른 민간병원에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 전 세계를 휩쓴 신종플루는 우리에게 전염병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공공의료의 필요성을 다시 일깨워줬다. 공익성을 추구해야 할 공공병원에 수익성 논리를 들이대는 것은 결국 공공의료를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는 최근 절반으로 삭감된 공공병원 지원 예산을 증액했다. 수익성과 공공성 사이에서 좌초 위기에 놓인 공공병원의 운명이 지금 국회에 맡겨져 있다.

[Tip]의료급여수급권자

생계유지능력이 거의 없거나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 등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상자들에게 보험료 부담 없이 무료로 의료보장을 해주는 공적부조 제도.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의한 수급자나 이재민·의상자·국내에 입양된 18세 미만의 아동·국가 유공자 등이 수급권자로 인정된다.

[Tip]지역거점 공공병원 국고지원

지역거점 공공병원은 공공의료의 지역단위 거점역할을 담당하는 의료기관으로 34개 지방의료원과 6개 적십자병원을 가리킨다. 참여정부는 선거공약으로 당시 지방공사의료원에 대한 지원·관리체계를 일원화하고, 지역거점 공공병원을 설립해 공공병원을 미국·일본 수준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복지부에 따르면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지역거점 공공병원 육성에 1천351억원이 투자됐다.



‘정책의료’ 수행하는 일본 공공병원
일본에서 전체 의료기관 가운데 공공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다. 지난 2005년 기준으로 병원수 기준으로는 20.8%, 병상수 기준으로 33.2%가 공공병원이다. 의료법인이나 개인병원보다 공공병원이 병상수 규모가 크고 개설 진료과 수도 더 많다.
우리나라의 지방의료원에 해당하는 병원은 지방자치단체병원으로, 우리나라의 광역자치단체에 해당하는 ‘도도부현’ 산하에 312개, 기초자치단체에 해당하는 ‘시정촌’ 산하에 762개의 병원이 있다. 지자체병원 노동자들은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공공병원들은 해당 지역의 의과대학과 제휴관계를 통해 우수한 의료진을 공급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공의에 해당하는 연수의가 공공병원에 왔다가 해당 병원 전임의사로 근무하는 경우도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의과대학 교수들이 서로 교대하며 진료를 한다.
일본에서는 공공병원이 민간병원과 차별화된 기능으로 난치성의료·구급의료 등 채산성이 없거나 전염병같이 공공재적 성격이 강한 정책의료를 수행하고 있다. 지방공기업법에는 공공병원이 경제성과 공공성을 갖도록 했는데, 공공성의 경영원칙을 유지하기 위해 현의 일반회계에서 일정한 기준에 근거해 공립병원으로 투입되는 지출금이 규정돼 있다. 가령 병원 신증축·리모델링 경비, 결핵·정신·장기요양의료에 필요한 경비, 구급의료 등에 필요한 경비가 대표적이다. 조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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