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사례를 볼 때 사용자가 단협 해지 카드를 꺼내드는 순간 노사관계는 파행을 면키 어렵다. 장기간의 극렬한 분쟁 끝에 ‘무단협 상태’가 이어지고 해당 노조는 와해되거나 무력화된다. 단체교섭을 다시 벌이더라도 이미 기력이 쇠한 노조는 ‘울며 겨자 먹기’로 양보교섭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32조 3항은 노사 당사자 누구나 단협 해지를 통고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누가 휘두르냐에 따라 ‘날 선 칼’이 될 수도, ‘무딘 칼’이 될 수도 있다.
정부라는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진행되는 공공기관의 단협 해지 움직임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노동부에 따르면 공공기관의 노조조직률은 65.8%에 달한다. 민간기업 노조조직률(10.6%)의 여섯 배가 넘는 수치다.
노동계는 노동시장 내 마지막 성역인 ‘철밥통 노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정부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정부가 정규직노조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넘어선 실질적 싸움을 걸어온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 끝엔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종착역이 기다리고 있다.
단협은 헌법상 노동3권에 근거해 체결되는 것으로, 노사관계 당사자가 근로조건이나 기타 노동자의 대우에 관한 사항과 노사 간의 권리·의무에 관한 사항을 합의해 서면화한 것이다. 또한 단협은 단체교섭권 행사의 산물이다.
노동3권의 꽃 ‘단체협약’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이 단체교섭권 행사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협은 노동3권 행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노사 간 힘의 대등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도 단협이 갖는 중요한 특성이다.
권력관계에서 열세에 놓인 노조는 합법적 쟁의행위를 통해 힘의 대등성을 얻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노사 간 단체교섭이 진행된다. 때문에 단협은 노사가 자치적으로 정한 각종 규범 중 최상의 위상을 갖는다.
노사 당사자 중 한 쪽이 단협 해지를 통고할 수 있다는 법조항은 98년 2월 노조법이 개정되면서 신설됐다. 그 뒤 지난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사측의 단협 일방해지에 반발하며 분신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단협 해지는 ‘신종 노조탄압’으로 불리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단협 해지 통고가 철저히 합법적·제도적 테두리 안에서 진행됐다는 점에서 ‘합법을 가장한 노동3권 탄압’이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노동계 한 관계자는 “단협 일방 해지를 둘러싼 법정공방 사례를 찾기가 힘든데, 이는 노동자들이 법에 호소해 봤자 구제받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보이지 않는 손? 너무 잘 보이는 손!
단협 해지 통고 자체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단협 해지가 갖는 부정적 효과까지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발전적 노사관계에 역행하고,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기본이념인 노사자치주의에 위배된다. 전문가들 역시 “외부의 힘이 개입해 노사 자치질서를 뒤흔드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윤여림 공인노무사(법무법인 한울)는 “단협 해지는 그동안 노사가 쌓아올린 협상의 성과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며 “정부라는 공통의 사용자를 둔 공공기관 사이에 단협 해지가 유행처럼 번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공공기관노조에 대한 정부의 공세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8월 처음 발표된 ‘공공기관 선진화방안’을 시작으로 인력감축·초임삭감 등 공공기관노조를 겨냥한 대대적인 사정이 진행됐다. 감사원까지 가세해 전례가 없는 공공기관노조 감사를 진행했고, 기획재정부와 노동부는 각 기관에 단협 개정지침을 내렸다.
행정안전부도 공무원노조를 겨냥해 “노조에 협조적인 기관장은 문책하겠다”고 경고한 상태다. 정부가 공공기관노조의 단협을 문제 삼는 이유는 간단하다. 공기업 선진화방안의 핵심인 ‘경영효율화’를 달성하기 위해 비용절감이 필수적인데, 현재의 단협이 정부 계획에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공공기관 기존 직원의 복리후생비를 크게 줄여 임금삭감을 유도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보수 체계를 개편해 호봉테이블을 폐지하고 성과연봉의 비중과 차등 폭을 늘리는 내용의 연봉제 가이드라인도 발표할 예정이다.
기존 직원을 상대로 연봉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노조와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연봉제 도입이 단체교섭이나 단협의 무력화를 초래한다는 면에서 볼 때, 노조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가능하다. 단협 해지가 무단협 상태로까지 이어지면, 각 기관과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임금체계 개편 움직임은 급물살을 탈 수 있다. 각종 복리후생 축소와 상시적인 인력구조조정도 보다 손쉽게 이뤄질 수 있다. 해고의 자유 확대, 임금과 사회복지지출 삭감은 노동 유연화의 핵심이다. 조직률 65.5%의 ‘철밥통 노조’를 깨 정부가 취하려는 것도 이것이다.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또 있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국민에게 ‘신의 직장’으로 인식된 공기업, 특히 공기업 노동자들을 공격함으로써 정부는 ‘개혁의 선도자’라는 이미지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부는 ‘노사관계 선진화’ 정책 홍보 홈페이지(www.nosabravo.or.kr)에서 불합리한 노사관계의 유형을 여덟 가지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부당노동행위 △인사·경영권 제약 △무노동·무임금 원칙 위반 △불법·파업·정치 파업 △불법파업에 대한 민·형사상책임 면제와 해고자 복직 △산별교섭을 둘러싼 이중파업 및 이중교섭 △과도한 유급노조전임자 유지 △위법한 단체협약 및 노조규약 등이다.
공공부문 노사관계 ‘먹구름’
사측의 부당노동행위를 제외하면, 노조가 우리나라의 노사관계를 왜곡하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러나 노동부가 문제 삼는 내용들은 대부분 노사 당사자가 진통을 겪으며 만들어낸 대화의 산물이다. 이 같은 합의가 도출되기까지 결코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이 소요됐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노사관계도 성숙해 왔다.
하지만 노사 당사자의 한 축인 공공기관 사용자들이 정부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어, 공공부문 노사관계에 드리워진 먹구름은 쉽게 가시지 않을 전망이다. 단협 해지를 비롯한 일련의 조치가 공공기관의 공공성을 저해할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김동원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정부가 ‘불합리한 단체협약을 개선하라’는 지침을 내렸을 때, 공공기관 사용자들이 이것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정부정책의 시녀가 되는 순간, 해당 기관의 존재가치는 사라진다”고 비판했다.
이럴 때일수록 공공기관노조의 자기혁신이 절실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해당 노조가 상대적인 고임금과 정년보장 등에 안주하며 보수화되는 사이, 국민이 느끼는 철밥통 여론도 공고해졌다.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 등에 의해 임금 인상 폭이 제한되면서 이들 노조가 각종 복리후생으로 소득을 보전해 온 사실을 알고 있는 국민은 많지 않다.
유병홍 사회공공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은 “노사관계는 막장으로 치닫는데, 노조에게는 우군이 없다”며 “해당 노조들이 연대투쟁을 통해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는 길 외에는 뚜렷한 해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제조업 사업장에서의 단협 해지 갈등도 여전하다. HS바이오팜·진방스틸·DKC·두산모트롤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두산모트롤(옛 동명모트롤)은 지난 4월16일부로 단협 효력이 소멸됐다. 이후 사측은 전임자에게 현장복귀를 명령하고, 지회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지회 사무실 퇴거와 현수막·게시판 철거를 요구했다. 7년 전 두산중공업에서 벌어졌던 상황이 고스란히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현행 노조법에 따르면 단협 해지 통고 6개월이 지나면, 노사가 체결한 기존 단협의 효력은 사라진다. 단, 단협이 해지되더라도 임금액·임금지급방법·근로시간·복리후생·정년제 같은 규범적 부분(근로조건이나 노동자의 대우에 관해 정한 부분)은 유지되며, 개별적 근로관계 역시 유지된다.
문제는 집단적 노사관계다. 노조활동에 대한 단협 규정은 기간 만료와 동시에 효력이 사라진다. 단협 해지가 ‘합법적인 노조탄압 수단’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구은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