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파견 정규직화’ 지난 한해 수백번 수천번 현대차비정규직노조 5공장 농성자들이 외쳤던 단어지만 해가 지난 2006년 현재는 가슴속 깊이 묻어뒀을 뿐이다.

지난해 1월18일, ‘투싼’을 생산하는 현대차 5공장 라인이 멈췄다. 현대차노조 임단협 당시 수차례 세워졌던 라인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에 덩달아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라인을 세운 것. 불법파견 판정을 받고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부분파업을 벌이던 현대차비정규직노조가 회사쪽의 대체인력 투입에 반발해 전면파업을 선언하고 1년전인 이날 5공장 탈의실에서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39일이 지난해 9월13일에서야 5공장 탈의실에서 농성을 계속하던 79명의 농성자들이 그곳에서 나왔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공장 밖' 아직은 낯선 그들 

지난 21일 5공장 농성자 신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불법파견 투쟁단' 사무실이 있는 현대차노조 울산공장 정문 앞 <울산노동자신문>을 찾았다. 8개월 가까이 5공장 탈의실을 지키던 이들이 자신이 작업하던 5공장 ‘투싼’ 라인이 아닌 공장 밖 이곳에 근거지를 마련한 것.

오후 6시께, 불법파견 투쟁단장을 맞고 있는 박경렬(26)씨의 표정이 밝지 않다. “얼마나 모일지 모르겠어요. 농성을 끝내고 지난해 두 번 정도 모이긴 했는데 각자 생계 문제로 너무 바빠서…. 그래도 20여명 안팎으로는 모였는데.”

경렬씨는 79명 농성자들의 연락처를 손에 쥐고서도 직접 전화를 걸진 않는다. 혹여 오는 전화들을 놓칠까 바라만 보고 있을 뿐. 간간이 개인적인 일로 참석이 불가능하다는 농성자들의 전화에서 경렬씨의 아쉬운 표정이 묻어난다.

농성이 끝난 지난 10월께부터 불법파견 투쟁단 사무실 앞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는 유아무개(44)씨 등은 미리 도착해 음식준비로 분주하다. 3개월간의 포장마차를 운영한 실력은 유씨의 손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아니, 평소보다 좀더 정성을 쏟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리 식구들 줄 거라 돈 받으면 안 되는데, 이번달에는 워낙 포장마차 운영이 안돼서 재료비조차 안나오거든요. 3명이 같이 운영하는데 현재 통장 입고된 돈이 60만원이에요. 오는 4일이면 이 돈을 셋이서 갈라야 하거든요.” 포장마차를 함께 운영하는 김태선 아주머니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1월 농성이 시작된 후 하청업체들이 농성자들을 잇따라 해고하고 농성장 단전단수까지 벌이자 이에 항의하며 16일간 단식농성에 들어갔던 다섯명의 여성조합원 중 한 명이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자녀를 두고 있는 그는, 손에 쥐어지는 20여만원의 돈을 갖고 2월 한달을 살 생각에 난감하기만 하다.

음식 준비가 거의 끝나가는 순간 239일간 동거동락했던 ‘동지’들이 사무실로 하나둘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기는 사람은 며칠 전 출소한 하정기(35)씨. 현대차비정규직노조 1기 집행부 정책기획팀장을 맡았던 그는 업무방해 협의 등으로 수배생활을 하다가 구속됐다. 그리고 바로 일주일 전 석방됐다.

아주머니들이 먼저 반갑게 정기씨의 손을 잡는다. 정기씨는 9월13일 1기 집행부 사퇴 이후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김상록 부위원장, 조가영 교선팀장과 함께 공장 안에서 한달여 단식농성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후 공장 밖에서 수배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아주머니들과 오랜만에 대면하는 자리. 서로들 손을 꼭 잡고 어깨를 토닥이며 안부를 물을 뿐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오후 7시가 되자 안기호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전 위원장을 비롯해 5공장 농성장을 지켰던 이들로 사무실이 메워졌다. 비록 79명 모두 모이지는 못했지만 20여명 안팎의 인원으로 금새 사무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음식이 준비되고 박현제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위원장까지 모두 자리에 앉자 비로소 5공장 농성자 신년회가 시작됐다.

막막한 생계, 막막한 불파투쟁


술자리가 중반을 넘어가는 동안 이들이 나눴던 이야기는 이랬다.

‘요새 뭐하냐’, ‘어디 일자리 없어?’, ‘누구누구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데, 그건 돈벌이가 좀 되나?’, ‘그래 거기가 괜찮아’, ‘한번 가볼까?’ 등등….

농성자들 대부분은 적지 않은 기간의 농성으로 생계조차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이날 자리에서 처음 나온 이야기는 그래서 ‘생계를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가’가 주된 화두였다. 그나마 아직 결혼하지 않은 20대 농성자들의 경우 건설현장에서 막노동도 하고 자동차 관련 업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다시 직장을 잡기도 했다. 또 일부는 친척들 일을 도와주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아주머니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식당일 정도가 전부다.

자신의 형부 밑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김귀순 아주머니는 현재 처지에 대해서 말하기 주저했다. 대신 공장에서 일한 수년의 세월을 쏟아낸다. “현대차에서 일할 때는 내가 한달에 500시간도 일을 했거든. 주야 맞교대 다 뛰고 다음날 주간 한번 더 뛰는 식으로 36시간을 일하면 160만원 정도 받았는데, 정규직 아저씨들이 그랬어. 보험 몇개 들었냐고, 날 받아놓고 일하는 것처럼 보였나봐.”

힘들었던 시절. 그러나 어느 정도의 안정은 있었다. 김귀순 아주머니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8개월의 시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 아무런 성과도 없이 쫓기듯 공장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지금 이 순간도 억울할 뿐이다.

“현대차노조가 임단협을 끝내고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정규직노조는 불법파견 문제를 특별교섭에 맡겨 놨고 또 곧바로 선거에 들어갈 시긴데, 그 안에서 투쟁을 만들고 조직할 수 없잖아…. 더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

그날 9월13일. 5공장 농성장에 남아있던 20여명의 조합원들이 그곳서 생활하던 짐을 1.5t 포터에 실어 공장 밖으로 나왔다. 농성장 정리를 결정한 9월10일께부터 이날까지 이들은 ‘술’로 그 허탈함을 달랬다고 했다.

소주 한 잔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다는 김귀순 아주머니 역시 당시 소주 한 병을 부었다고 했다. “맨 정신에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겠어.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거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낼 모레면 공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는 거야.”

아마도 그랬을 거다. 처음으로 현대차라는 거대한 회사를 상대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라인을 세웠고, 그때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로 함께 했던 이들도 상당했다. 당시엔 출근선전전을 함께 진행했던 비정규직 노동자만 300여명이었으니까.

그리고 1월말부터 설연휴 전까지 5공장 농성자들을 상대로 해고가 잇따르자 결국 79명의 농성자만 남게 됐다. 비록 적은 수였지만 다시 힘을 냈고 5~6월 현대차노조와 함께 비정규직 조직화에 힘을 쏟았던 이들도 5공장 농성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현대차노조 임단협 때 반드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절친했던 동료 ‘기혁’이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현실이었고, 그런 기혁이의 죽음을 뒤로 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의 꿈을 놓아야 했던 그들의 상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1기 집행부 총무부장을 맡았던 김희선(34)씨는 “이제 좀 조용히 살고 싶다”고 말한다. 농성 시작하자마자 동료 최남선씨가 분신을 기도했고, 아주머니들의 단식농성, 안기호 위원장의 연행, 비일비재했던 현대차경비대의 폭력, 기혁이의 죽음,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던 그들에겐 너무도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평생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은 삶이었다는 것.

희선씨 룸메이트인 용진(35)씨도 농성을 중단하면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꿈을 접었다. 1년여 동안의 긴 시간 동안 그에게 돌아온 건 늘어난 나이 뿐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지금 중소영세업체에 일하고 있는 그의 꿈은 다시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불가능한 꿈을 꾼다

이날 술자리에 참여한 몇몇 농성자들은 아직 마땅한 직장을 잡지 않고 있다. 언제든지 불법파견투쟁단이 다시 투쟁을 시작하면 함께 나서겠다는 게 이들의 이유다. 물론 79명 모두가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는 군대에 가있고 일부는 정말 생계에 나설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모두가 아닐지라도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술자리 내내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기호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전 위원장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근 토론회와 <매일노동뉴스> 인터뷰를 통해 2월 중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하던 그였지만 말이다. 지난해 1월 이들과 함께 농성을 시작하고 한달도 채 되지 않아 구속수감 됐던 안 위원장은 지난했던 이들의 농성기간 동안 함께 할 수 없어 누구보다 마음이 아팠던 이 가운데 한명이다.

‘불법파견 투쟁단’으로 전환한 5공장 농성자들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하정기 팀장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1기 집행부의 일원으로서 지난해 긴 투쟁을 의미 있는 성과로 만들어 내지 못해서 지금도 너무 안타까울 뿐이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승리할 수 있는 싸움이라는 확신은 여전하다. 비록 지금 힘들지만, 이 싸움을 만들어갈 가능한 동지들과 함께 불법파견 투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5공장 농성자들과 긴 시간을 함께 했던 1기 집행부들은 다시 이들과 함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준비하려고 하고 있었다. 조합원들을 만나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지도 못한 상황에서 아직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다.

“모두에게 미안합니다. ‘정규직화’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이들에게 이야기했는데 결국 현재는 꿈이 돼버려서, 하지만 불가능한 꿈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날 술자리에 참여했던 박현제 위원장도 해고된 이들 조합원들 문제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불법파견 특별교섭이 계속되고 있어서 그 논의를 지켜보겠지만 비정규직노조의 조직을 강화하고 우리 스스로 이들을 공장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오후 7시부터 시작됐던 술자리는 다음날 새벽 5시까지 계속됐다. 이전 농성장 생활처럼 먼저 자리를 뜬 이들도 있었고 뒤늦게 함께 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먼저 자리를 떴다고 늦게 결합했다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비록 5공장 탈의실 농성이 끝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일부만이 나설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79명 농성자 모두의 마음속에 '불법파견 정규직화’라는 불가능한 꿈이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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