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아침, 포항행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당일까지 132일, 3일로는 139일째 파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시멘트노조를 찾기 위해서였다. 5시간을 넘게 달려서야 만날 수 있었던 그들. 약간은 무료했던 시간. 편한 교통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투자한 시간만큼 이들과의 만남은 더욱 반가웠다.
그러나 시간을 투자할수록 더욱 괴로워지는 이들도 있다. 아쉬울 것 없는 경영진들에 의해 내팽개쳐져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 바로 장기투쟁사업장의 조합원들이다. 그래서 더이상 버릴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이들. 그 끝에 ‘행복’이 반겨줄지, 아니면 ‘불행’이 도사리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하기만 한 이들. 그런 그들이 새해 벽두부터 본격적인 상경투쟁을 시작했다.
100일 넘는 파업, 해결의 기미조차 없어

한국시멘트는 76년에 설립돼 30년째 슬래그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는 회사다. 시멘트에 슬래그(철광석을 제련한 후 남는 물질)를 섞어 강도를 더욱 높인 제품이다. 연간 생산량은 약 250만톤. 톤당 약 5만원의 단가로, 연간 매출액은 1천3백억원에 이른다.
지난 95년도까지는 시멘트 업계에서는 그나마 잘나가던 회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시련이 덮쳐 왔다. 95년 모기업인 덕산그룹의 부도와 함께 지급보증을 섰던 한국시멘트도 연쇄부도를 맞이한 것. 한국시멘트는 곧 법정관리에 맡겨졌고 이 과정에서 직원 130여명은 퇴직금을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약 20억원을 대출받아 회사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정관리를 벗어나던 지난 2002년, 투입됐던 2천2백억원의 공적자금이 허공으로 흩어져버린 회사이기도 하다. 또한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서면서 전현직 경영진들의 비리 문제 또한 사법부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본지 지난해 10월10일자 참조>
올해 생산량은 30% 정도가 떨어진 약 160만톤이 예상되고 있다. 이는 노조가 파업을 벌여 생산량이 떨어진 탓도 있지만 건설 경기 자체가 나빠진 영향도 크다. 그럼에도 아직까진 흑자다. 조합원 48명이 파업을 벌였지만 회사는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직원과 관리직까지 동원해 그럭저럭 공장을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포항 한국시멘트 공장에 도착한 오후1시께, 조합원 40여명이 공장 앞에서 집회를 벌이고 있었다. 광주 한국시멘트 본사 앞에서 노숙투쟁을 끝내고 온 뒤 3주 정도가 지난 지금. 그 뒤로는 사실 소일거리도 없이 노조 사무실만을 지켜왔지만 기자가 온다는 소식에 모처럼만에 기지개를 편 이들. 파업 132일. 이제는 지칠만도 했기 때문일까. 이제는 급할 것도 없다는 뜻인가.
그게 아니다. 벌써 넉달째 집에 생활비 한푼 못 갖다준 이들이다. ‘집안 사정이 어떤지 아느냐’는 아내의 푸념에도 마음속 괴로움을 씹으며 아무말도 못하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불과 3주전 전까지는 광주 한국시멘트 본사 앞에서 영하를 넘나드는 기온 속에서도 20여일이 넘게 노숙투쟁을 해 왔던 이들이다. 무엇보다 파업이 하루빨리 끝나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고 그것을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러나 이 소강 국면 상태, 이 현실이 이들이 처해 있는 현 상황 그대로이기도 하다. 파업 100일을 즈음해 광주노동청의 중재로 열렸던 교섭도 노사간 서로 이견만을 재차 확인하고 끝나면서 더이상 협상은 예상하기 어렵다. 회사나 노조 모두 ‘하루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타협의 국면은 보이지 않고 있다.
집회를 하고 싶어도 집회할 만한 장소도 없다. 포항에 있는 한국시멘트 공장과 광주에 있는 한국시멘트 본사 모두 직장폐쇄가 된 상태다. 바깥 상황도 마찬가지다. 노조가 집회를 자주 열었던 한국시멘트 공장과 본사 앞, 최대주주인 남화산업 본사 앞, 계열사인 무한CC 골프장, 남화산업 회장 최모씨의 집 앞 등은 근처 500m 안에서는 집회도 할 수 없게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변호사를 고용해 이의신청 끝에 겨우 한국시멘트 포항 공장 앞에서만 집회를 열 수 있게 됐다. 파업에 들어가기 전까진 직장폐쇄가 뭔지, 집회금지 가처분신청이 뭔지도 몰랐던 이들이다.
“법, 우리 편 아니다”

“직장폐쇄,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 파업 들어가서야 이런 것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못 가진 우리같은 사람들은 아는 것도 없었고 법은 가진 자들에게만 유용한 것이라는 걸 처절하게 느꼈다. 우리는 파업을 하면서 처음부터 준법을 하겠다는 내부 다짐들이 있었다. 법 테두리 안에서 집회신고도 철저하게 하고 집회를 하면서도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랬을 때만이 시민들이 호응을 해주고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이런 상황에 처하고 나니 ‘준법’이라는 게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한국시멘트 노조 조합원 이선규(43)씨의 불만은 이렇게 터졌다.
“법은 우리 편이 아니다”는 게 이들이 130여일을 넘게 파업을 하면서 몸으로 체득한 현실이었다. 주승용 조합원도 마찬가지다. “집회도 못하게 하고 본사와 공장에서 농성도 못하게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그는 말을 받았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 김종한 전 조합장에 대해서 부당해고로 판정해 복직을 명령했다. 그러나 회사쪽은 이를 차일피일 미루며 복직을 시키지 않고 있다. 이를 이행하지 않아 회사쪽에 벌금이 떨어졌지만 내고 나면 그뿐이다. 회사는 지키지 않아도 되고 우리는 지켜야 하는 법. 법이, 법이 아니다.”
18년만에 파업을 벌인 노조. 평범했던 ‘소시민’들이 파업을 통해 ‘노동자’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현실이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노동자들은 항상 ‘불온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지난해 내내 정부는 합리적인 노사관계를 만들겠다며 노조의 불법행동에 대해서는 엄단의 의지만을 밝혀왔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이런 정부의 되뇌임은 별나라 세상의 이야기와 같다. 노조는 법을 준수하며 합리적인 노사관계를 지향했지만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게 바로 현실이다. 이들의 주장은 바로 그런 것이다.
"조합원들끼리 모이면 한명이 죽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봤고 130일을 넘게 파업을 해 오면서 그런 생각을 안 해본 조합원들이 없을 것이다.” 주 조합원의 심정은 이렇게 절박하다. 이들의 입장에선 집회도 마음대로 못하고, 그렇다고 해결(타협)의 가능성도 보이질 않는다. “노조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이들의 반문은 그래서 더욱 간절하다.
이선규 조합원이 다시 말을 받는다. “법대로 했을 때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다 안다. 또한 무언가 불법을 저질렀을 때만이 사태가 이슈화 되고 정부나 다른 사람들의 관심도 끌 수 있다. 파업이 이미 130일이 넘는 지금, 우리는 ‘불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맞닥뜨려 있는 것이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조합원 48명의 평균 근속년수는 약 19년. 거의 대다수가 마흔 중반을 훌쩍 넘은 나이다. 87년 노조를 설립할 당시 딱 한번의 파업을 해 봤을 뿐 노사분규 한번 없이 편안한 세월을 보냈던 게 벌써 18년. 노조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조차 깊은 고민 없이 그냥 있으면 있는 대로 순박하게 살아왔던 세월이다. 그런 순박했던 이들은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이들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겉은 조용했지만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이들의 움직임은 부산했다. 지난 12월초 조합원 중 37명이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민주노동당에 기대서라도 새로운 해결점을 찾고 싶은 게 이들의 마음이다. 그리고 그 고민은 곧바로 상급단체 변경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먼저 노조 쟁의부장인 이상규씨(46)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상급단체 변경 건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해야겠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이를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고민을 갖고 있다. 그동안 한국시멘트 노조가 한국노총 소속으로 파업을 진행해 왔다. 파업은 처음이라서 상급단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교섭과 투쟁금 지원뿐 다른 노조와 연대는 없었다. 그리고 교섭이 중단되고 투쟁이 필요한 시점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만들어주고 있지 못하다.”
순박했던 사람들이었던 만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구분하는 조합원들의 의견도 단순했다. 한국노총은 ‘교섭’을 하는 단체고 민주노총은 ‘투쟁’을 하는 단체라는 것. 그리고 현재 대다수의 조합원들이 상급단체를 변경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단순하다. 지금은 교섭이 아닌 투쟁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상 한국노총은 투쟁에는 여전히 미숙했다. 그게 지역 현장에서 느끼는 한국노총의 한계다.
물론 지난 130여일간 파업을 해 오면서 상급단체인 화학노련과 한국노총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서 조합원들은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노총의 태도에 대해서는 많은 아쉬움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지금까지 상급단체가 지원하고 도와준 것에 대해서는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그러나 지금 한국노총의 움직임은 너무 미온적이어서 아쉬움이 크다”고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고 있다.
이희원 노조위원장의 말이다. “지금까지는 어쨌든 법 테두리 내에서 문제를 해결해 오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조합원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벗어난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답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고민은 마찬가지다. 그 동안 상급단체인 화학노련과 한국노총에서 받은 도움들도 많았기에 이를 무시하고 상급단체를 변경할 수는 없다. 또한 조합원들의 강경한 목소리대로 투쟁을 했을 때 돌아올 후과를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위원장과 조합원들 모두가 이같은 고민의 시간이 길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급단체에서 또다른 지원대책을 마련해 오지 않는 이상, 파업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이 조성되지 않는 이상, 갈 길은 사실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도덕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준법투쟁을 해 왔다. 그러나 지금 조합원 대다수의 의견은 ‘이제는 이기기 위한 투쟁’이라도 하자는 것이다.” 이어진 이 위원장의 말 속에 답이 있었다.
담을 붙이고 같은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는 ‘수성시멘트’는 조합원이 불과 5명에 지나지 않는다. 공장 규모도 한국시멘트보다 작다. 그러나 그들이 집회를 할 때면 항상 3~4백명의 사람들이 모인다. 그것이 연대의 힘이다. 그런 수성시멘트노조는 ‘민주노총’ 소속이다. 솔직히 조합원들은 그게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까지는 파업 이후 자신들을 지켜준 화학노련과 한국노총에 희망을 버리진 않고 있다. 이들은 새해가 시작된 직후, 2일 전격적으로 상경투쟁에 나섰다. 한국노총 7층 회의실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일단 한국노총과 함께 끝까지 투쟁을 한 이후 향후 일정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노조만이 살길이다…위원장 복직에 목숨 건 이들

회사와 노조는 현재 해고자 복직 문제를 놓고 정면 대치하고 있다. 노조는 해고자 복직만 약속된다면 임금과 단체협상에서는 양보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회사는 이와 반대로 임금과 단체협상은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수는 있지만 해고자 복직만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현재 해고 상태에 있는 사람은 회사 법정관리 당시 비대위원장을 맡았던 김종한씨와 이희원 현 노조 위원장 등 단 두 명. 전 비대위 조합장은 중노위에서 이미 복직판결을 받았지만 이행되지 않은 상태이고, 이 위원장은 지노위에서 패소한 후 중노위에 항소, 계류 중이다.
해고자 복직 문제가 쟁점이 된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위원장의 복직 여부가 파업복귀 이후에 노조의 지속 여부를 판가름 할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합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이후의 고용안정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조합원들의 고용불안감에 대해서 물으니 회사쪽 관계자들은 그냥 웃는다. 회사에서는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 이야기들이 왜 퍼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진준형 한국시멘트 총무팀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에서는 파업이 끝난 뒤 조합원이 돌아온다 해도 인사상의 불이익을 줄 마음이 없다. 회의석상에서도 구두로 여러번 이를 밝혔고 개별적으로 조합원들을 만나면 이를 설명한다. 장기파업 후 작업장에 복귀했을 때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를 협약서로 보장해 줄 수도 없는 것 아니냐.”

그러나 조합원들의 ‘막연한 불안감’은 괜히 생긴 것은 아니다. 노조가 파업에 들어간 후 50여일이 지난 후에 조합에 가입해 파업에 동참한 최낙선씨. 그의 직책은 품질관리과장이었다. 이미 관리자급에 들어선 이가 왜 노조파업에, 그것도 뒤늦게 결합했을까.<상자 인터뷰 참조>
“조합원은 아니었지만 평소에도 노조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을 해 왔다. 법정관리 당시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나섰던 이들이 바로 조합원들이었다. 그러나 법정관리가 끝난 지금, 새로운 경영자가 왔고 새로 온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어려울 때 회사를 지켰던 이들은 다시 주변부로 밀려 났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직장폐쇄’ 등 부당한 조치들의 취해졌다.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주승용 조합원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때 관리팀에서 노무관리를 맡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광주로 발령이 났다. 집도 가족도 포항에 있는데 광주로 출퇴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남화산업이 최대주주가 될 때 동의를 안했다는 것이다.
“인사로 보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전보는 물론 대기발령까지 났다. 지난해 비상대책위를 하면서 회사에 협조를 안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다. 남화산업이 불법으로 조성된 주식을 사서 대주주가 됐다는 것은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았던 사실이고 이는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에 대한 진정서를 넣기 위한 서명을 받았다. 내가 한 것은 그 서명에 동참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리곤 얼마 후 전보 명령을 받게 됐다.”
심지어는 노조 사무실을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 대기방령을 받은 관리직 사원도 있었다. 이심전심으로 모인 관리직 사원들이 과장급 3명을 포함한 모두 9명. 이들은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지 49일째 되는 지난 10월5일 성명을 내고는 파업에 동참했다.
해를 넘겨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05년도에 시작된 파업은 해를 넘겨 2006년도로 이어지고 있다. “파업이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파업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한 조합원의 푸념처럼 한국시멘트노조의 파업투쟁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는 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경험들을 한 해이다. 또한 올해 이들은 지난 130여일간의 파업투쟁 속에서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하는 한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회사는 오는 3월31일부로 단체협약 해지통보를 해 왔다. 그 날짜가 노조에서는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 되고 있다.
마침 기자가 포항을 방문한 다음날인 28일 노조에서는 임기 1년인 대의원선거를 치렀다. 새로운 변화가 예상되는 징조다. 노조에서는 현재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신념은 적어도 해고자 복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불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상태라면 이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것은 반대로 2006년 새해를 맞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아직도 합리적인 노사관계가 자리 잡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불법에는 엄단하겠다는 원칙만을 되뇌고 있다. 투쟁하지 않는 이상 현실은 여전히 노동자의 편은 아닌 것이다.

올해 나이 마흔둘, 92년 한국시멘트에 입사한 그는 13년차지만 조합원 중에는 거의 막내뻘에 속한다.
파업에 동참한 이후 그는 “눈치보고 숨죽여 지냈던 날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산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면서도 “돈 한 푼 못 주고 있어 생활 걱정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아내에게 가장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를 만나 소회를 들어봤다.
- 파업이 한창일 때 노조에 가입했다.
“지난 9월26일, 회사가 직장폐쇄를 통보하는 순간 결심을 하게 됐다. 이심전심으로 뜻이 맞았던 관리직 사원 9명이 함께 동참했다. 조합원은 아니었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나 역시 보고 듣는 것이 많았다. 평소 노조가 하는 일과 주장에 공감도 많이 했다. 그러나 회사가 직장폐쇄를 공고하는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굳혔다. 사실 ‘직장폐쇄’라는 단어조차 처음 들어봤다. 노조가 불법적 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이는 너무나 부당한 조치였다고 생각했다.”
- 파업이 벌써 4달째이다. 생활은 어떻게 꾸려가고 있는가.
“연속된 투쟁과 노숙농성에 몸은 진짜 힘들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편했다. 눈치보고 숨죽여 지냈던 날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산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그러나 생활 문제가 제일 힘든 부분이다. 제일 먼저 하게 되는 게 아이들 학원을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동안 집을 옮겨보려고 모아둔 돈을 쓰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벌써 15년째다. 가족들과 많이 이야기를 하고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면 아내가 격려를 해주기도 한다.”
- 그래도 갈등은 있을 것 같다.
“어느날은 아내가 파업에 언제까지 참여할 것이냐고 묻더라. ‘해결될 기미가 보이냐’, ‘파업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냐’ 묻더라. 사실 그날 많이 다퉜다. 그래서 이틀간 각방을 쓰기까지 했다.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아니냐’고 물을 땐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그땐 그런 것까지 모두 신경써가면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노조 투쟁만 하는데도 힘이 들던 시기였다. 한참 노숙투쟁을 할 때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볼 수 있어도 애틋했는데, 파업이 길어지고 이렇게 아내와 다투게 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각방까지 쓰긴 했지만 결국 아내가 이해해 주면서 끝이 났다. 그냥 고마울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