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는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전북 익산에 있는 상떼힐 익산 골프장 경기보조원입니다”라는 인사로 시작해 “저희는 부당징계 철회와 회사의 성실한 교섭을 원합니다”라는 당부말로 끝맺고 있다.
사연인즉슨, 올 3월 시작된 단체교섭에서 골프장측이 “경기보조원은 법적 근로자가 아니므로, 기존 단협 내용 중 경기보조원과 관련된 모든 부분을 삭제하자”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노조는 “조합원 10명 중 9명이 경기보조원인 상황에, 경기보조원만 쏙 빼자는 것은 결국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전형적인 골프장 싸움. 특수고용노동자인 골프장 경기보조원의 노동자성 인정여부를 둘러싼 공방이 전북 익산의 한 골프장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손님을 막겠어요?"
전북 익산시 덕기동 산 226-1번지. 한달 가까이 묵혀둔 편지봉투를 챙겨들고 찾아간 곳은 총 면적 32만평에 전체 18홀 코스로 구성된 회원제 골프장이다. 인근 주민들에게는 ‘상떼힐 익산C.C'라는 어려운 이름 대신 ‘팔공 골프장’으로 통한다. ‘팔공 골프장’으로 시작해 ‘익산컨트리클럽’에 이어 ‘상떼힐 익산 컨트리클럽’까지, 골프장 사장이 바뀔 때 마다 골프장 이름도 변해왔다.
골프장 입구에 들어서자 이곳저곳에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새로 짓는 클럽하우스 공사현장도 눈에 띤다. 공사현장 이곳저곳에는 노조가 걸어놓은 현수막들도 보인다. 현수막만 쭉 훑어봐도 지금 골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우수브랜드 성원건설, 노동조합 탄압도 우수기업입니다”. “노동조합 탄압하는 부당해고 중단하라”, “무기한 배치중지가 웬말이냐. 생존권을 보장하고 노동조합 인정하라”.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골프장 전체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 간간히 들리는 공사 소음을 제외하면, 골프장 전체가 고요하다. 사람들 상대로 돈을 버는 대표적 서비스업종인 골프장에서 사람 그림자 찾아보기가 어렵다. 노조가 이틀째 골프장 회원들의 출입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손님을 막는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데….
“저희들이 오죽하면 손님들까지 막겠습니까. 오죽하면….”
민효준 노조 위원장의 설명은 차라리 하소연에 가까웠다. 제조업 공장이라면 라인이라도 멈춰 보겠지만, 골프장에서는 노조가 파업에 돌입해도 회사는 콧방귀도 안 뀐다. 돈 벌이에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일까?
“오늘로 노조가 파업에 들어간지 56일째 입니다. 노조의 요구는 하나에요. 경기보조원의 노조 활동을 인정하라는 것. 그런데 회사는 귓등으로도 들으려고 하지 않죠. 오는 손님을 막고, 영업에 손실이 생기면 그때는 노조의 주장에 귀 기울여주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골프장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경기보조원은 노조 못해!"
이 골프장에 처음 노조가 만들어 진 건 지난 2003년 4월. 사무직 직원, 잔디 및 수목관리 직원, 보일러실 직원, 운전기사 등 정규직노동자 10명과 골프장 경기보조원인 비정규직노동자 96명 등 모두 106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고, 같은 해 8월 당시 골프장을 운영하던 대원개발과 단협을 체결했다. 당시에도 경기보조원을 조합원으로 인정할 것인가 여부를 두고 노사간 마찰이 있었고, 이에 노조는 70여일에 걸쳐 파업까지 벌였다. 그 결과 ‘경기보조원의 노조 활동’을 인정한 단협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는데.
“2003년 8월 단협을 체결했고, 2004년 2월에 골프장 주인이 성원개발로 바뀌었어요. 성원개발은 골프장을 인수하면서 노조승계, 단협승계, 전 조합원 고용승계를 약속했고요. 그리고 올 3월, 기존 단협 유효기간이 만료돼 사쪽에 교섭을 요구했는데, 대뜸 경기보조원과는 교섭할 수 없다고 나오더라고요.”
3월 처음 교섭이 시작됐을 때부터,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현재까지 골프장측의 입장은 단호하다. “법적 근로자도 아닌 사람들의 노조 활동을 인정할 수 없으니, 굳이 노조 활동을 하려거든 법적으로 근로자성부터 인정받고 오라”는 것이다.

"고용보장, 무리한 요구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됐고, 골프장측은 ‘기존 단협을 2007년 3월까지 유지하고, 올해 정규직 임금은 동결하라’는 지방노동위원회의 조정안마저 거부했다.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고 골프장 안에서 집회를 벌이자, 골프장측은 노조 간부 12명에게 1인당 1,489만원의 손배가압류를 신청하고, 노조 주최로 열린 집회에 참여한 경기보조원 조합원들에게는 ‘무기한 배치중지’를 결정했다. ‘배치중지’, 쉽게 말해 손님이 와도 조합원들에게는 일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나마 일이 없으면 그것도 못 받지만, 하루 평균 한 게임 뛰면 캐디피로 7만원을 받습니다. 성수기냐 비수기냐에 따라 벌이도 달라지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월 130만원 정도 버는 셈이죠.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56일을 일을 못했어요. 애들 학원비며, 세금이며 다 밀려 있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15년째 경기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강봉경 씨의 말이다. 그녀는 노조의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미 3년차된 노조입니다. 이제 와서 무슨 명분으로 조합원을 부정하는 건지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가 무슨 4대보험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만 노조 활동하면서 고용만 안정되게 해달라는 건데….”
강씨의 말대로 특수고용노동자인 경기보조원들의 고용 불안은 매우 심각한 상태다. 골프장 관리들이 “이제 집으로 가. 다시 오지 마”하면 모든 게 끝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 노동조합은 최소한의 고용을 보장받기 위한 마지노선과도 같다.
“골프장 관리들은 걸핏하면 ‘언니들은 사장님이야. 노동자가 아니야’라는 말을 해요. 시킬 것 다 시키면서 말로만 사장님이죠. 자기들이 교육도 시키고, 자기들 맘에 안 들면 벌당(청소, 잡초 뽑기, 심부름 등)도 주고, 디보트(골프공 떨어진 자리) 메우는 작업 땐 점수까지 매기면서….” 노조의 쟁의부장을 맡고 있는 유현희 씨는 “우리는 개인사업자나 사장이 아니라, 노동자로 인정받고 보호받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다.
"보수적 잣대로 팔·다리 자르지 마라"
한편, 노조의 파업이 길어지고 투쟁 수위도 높아지자 골프장측은 최근 조합원들을 상대로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노조가 골프장 이동시 탑승하는 전동카트차 사용을 봉쇄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골프장 영업에 제동을 가하자, 골프장측은 교섭 대신 법적 대응을 택했다.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질 경우, 조합원들은 골프장 안에서 어떠한 쟁의행위도 할 수 없게 된다.
골프장은 가처분 신청서에도 “채무자(경기보조원 조합원)들은 채권자 회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가 아니며, 채무자들은 채권자 회사의 지시감독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다”고 못 박고 있다.
골프장의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 “캐디는 노동자 아니다, 캐디는 노조 할 수 없다. 캐디의 쟁의행위는 불법이다.” 골프장의 입장에서 볼 때, 경기보조원의 노동자성을 부인함으로써 근기법 상 해고제한 규정 등 사용자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낮은 근로조건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것 따라하기 좋아하는 우리나라가 하나 따라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에 대한 근기법과 노동법 적용인데요. 괜히 새로운 법 만들어 사람 헛갈리게 할 것 없이, 있는 법 적용만 해달라는 데 뭐가 그리 어려운 문제인가요? 도대체 노사정위는 2년반동안 뭘 한거고, 입법부는 내년에나 보호법안을 만드시겠다고요?” 골프장을 나서는 길에 만난 서비스연맹 이영화 조직국장의 분노섞인 말이다. 익산C.C 가처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그녀 역시, 하루아침에 골프장에서 해고된 경험이 있다.
이 국장은 “익산C.C 뿐 아니라 대부분 골프장 경기보조원들이 고용불안, 생계불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며 “보수적 잣대로 골프장 노동자들의 팔·다리 자르지 말고, 제발 있는 법 적용만 해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