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 같으면 당장 때리치았을끼다"
"너거 아빠는 마음에 안든다꼬 때리치아는 사람 아이다"

하지만 딸들은 착했다. 너무 했다 싶은지 분위기를 바꾸려고 엄마에게 아양을 부리는 다 큰 딸들. “엄마 오늘 맛있는 거 많이 하나?” 갑순씨는 눈을 한번 흘겨주고는 울리는 전화를 받으러 뛰어갔다. 큰집이다. 곽재규 열사의 형님네에서 기일이라고 전화를 넣은 것이다.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고는 오후에 온다고 하신다. 밥상에 다시 앉자마자 전화가 또 울린다. 갑순씨는 요즘 인구표본조사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옆동에 있는 한 집이 몇번이나 가도 사람이 없어 집에 있을 때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 전화다.
용건을 끝낸 갑순씨가 전화를 내려놓고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인구조사 하다 보면 별 사람을 다 본다면서 경우 없는 사람들 흉을 살짝 본다. '너희들은 그러지 마라'고 하는 소리인지 딸들이 왜 모를까. 경민이가 바로 맞장구를 친다. "우리 아빠 같으면 당장 때리치았을끼다. 그쟈?" 그러나 자식보다 아내 마음이 한결 더 윗길이다. "아이다. 내가 너거 아빠한테 한진이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고 다른 데 가서 벌면 되지 뭐 한다꼬 그래 노조를 하노 캄시롱 얼마나 잔소리를 많이 했다고. 너거 아빠는 마음에 안 든다꼬 때리치아는 사람이 아이다."
그냥 눈물이 나고 보고 싶을 뿐인데…"왜 자꾸 찾아와 생각나게 만들어요!"

경민이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그냥 눈물이 난다. 아빠는 잊지 않고 아빠의 죽음은 잊으려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는다. 애써 아빠의 죽음을 잊고 다른 일에 집중을 할 만하면 사람들이 나타나 물어보고. 그 물어본다는 게 또 뻔한 얘기인 게 더 싫다. “슬프제?” 당연히 슬프지. "아빠는 훌륭하신 일 한기라." 당연히 알지. "마음 크게 먹어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지금 나 시험 치나?
그럴 때면 아빠 생각이 더 난다. 안 그래도 보고 싶은 아빠인데. 아빠가 술 취해 투쟁 머리띠를 두르고 집까지 오셨던 날, 오늘같은 일요일이면 동네 뒷산에 가서 식구끼리 칼국수 해 먹던 날…. 다 생각난다. 커피 타 달라고 하셨을 때 "싫다"고 나가버렸던 날, 아빠가 심심해서 장난 거셨는데 안 받아주고 "아빠, 혼자 놀아라"고 고개 돌렸던 날, 김주익 아저씨가 돌아가셔서 아빠가 속상해 하시는데 한마디 위로도 못해드렸던 날…. 다 죄송하다.
만일 아빠가 돌아오신다면, 술 드시고 밤새 붙잡고 얘기를 하셔도 다 들어드리고, 머리카락 흘린다고 잔소리 하셔도 냉큼냉큼 줏어 치우고, '짠돌이'라고 놀려 먹지도 않고, 아빠가 좋아하셨던 칼국수, 수제비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고 같이 먹고. 그리고…. 그런데 아빠는 없다.
경민이는 아빠와 친하게 지내던 김주익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렇게 생각했다. “아저씨 회사가 아무리 나쁘게 해도 좀 참지. 애들도 세명이나 있으면서 애들은 어떻게 하라고?” 설마 우리 아빠가 그렇게 되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김주익 아저씨랑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아빠는 정말 바보다. 그래도 경민이와 영욱이는 아빠에게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원망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아빠에게 잘못한 거만 생각나고, 죄송하다.
영도에 사는 경민이와 영욱이는 집과 학교를 오갈 때면 한진중공업을 지나친다. 경민이는 한진중공업만 보면 폭파시켜 버리고 싶다. 아빠를 빼앗아간 회사다. 그러나 참는다. 그래도 한진중공업을 보면 그 안에 아빠가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요 바로 앞에 다방 보이지요?"…"여게가 바로 우리 처음 만난 데라"
곽재규 열사의 기일 며칠 전, 부산역 앞 어느 식당에서 곽재규 열사 부인 정갑순씨와 박창수 열사 부인 박기선씨를 만났다. 그런데 갑순씨는 고깃집에서 굳이 냉면만 드시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 마음을 왜 모를까. 곁에 있던 기선씨가 반갑고 그립고 미안한 마음을 돌려 표시한다. “형님 아 섭니까? 날도 추운데 와 냉면을 물라캅니꺼?” 그러자 갑순씨가 대꾸한다. “내가 요새 갱년기가 돼서 몸에서 열이 막 난다. 그라고 애들 아빠가 냉면도 좋아했다. 낮부터 냉면이 묵고 싶더만은 잘 됐네.” 갑순씨는 남편을 창황중에 보낸 뒤 갱년기를 맞았다. 남편이 있어도 죽을 만큼 힘이 드는 시기인데.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겨 근처 빵집에 자리를 잡았는데, 푸석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갑순씨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살짝 돈다. “요 바로 앞에 천초다방 보이지요? 처음으로 둘이 만났던 덴데 하필이면 요게 오게 됐실꼬…. 그때는 남편 키 작은 줄도 모르고 좋아했는데.”
세상 모든 것들이 남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길 가다 키 작은 남자를 봐도, 신혼초 살던 동네버스가 지나가도, 남자운동화만 봐도. 일 터지기 며칠 전 남편은 운동화 한 켤레 사 놓으라고 전화를 줬다. 신발이 없으면 벗고 다녔으면 다녔지 사놓아라고 하는 사람이 아닌데. 갑순씨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늘 하던 대로, 운동화 사서 회사로 갔다주겠다고 했는데. 이게 그만 부부 사이에 마지막 대화가 됐다. 곧 가지러 오겠다고 해놓고는 영영 집에 오지 않는 남편. 갑순씨는 남편의 죽음이 믿기지가 않는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문을 열고 들어 올 것만 같다.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생각에 미칠 것만 같은 갑순씨.
길밖에 자전거 탄 아저씨가 지나갔다. “작업복 들고 정문 면회실에서 기다리몬 남들은 다 자전거 타고 나오는데 우리 아저씨는 키도 작음씨롱 꼬질꼬질하이 해가 털레털레 걸어나오는 기 구름다리 너머 보이는 기라. 당신도 자전거 타고 나오지 뭐 때매 걸어댕기요 카이, 뭐라카는 줄 아나? 자전거를 몬 탄단다.” 많이도 울었을텐데, 무슨 눈물이 남아 있는지. 자전거를 탄 아저씨를 보고도 울고, 자전거를 타지 않은 아저씨를 보고도 운다.

유서도 안 남긴 남편…그러나 숙제는 남기고 간 남편
갑순씨는 겁많던 남편이 어떻게 11미터 도크 아래로 떨어졌는지,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다. 신혼초 달동네 단칸방에 살 때 도둑이 들었는지 밖에서 덜컥 소리가 나자, “니가 나가봐라” 하고는 이불을 뒤집어 썼던 남편이었다. 그 '겁쟁이' 남편이 도크 바닥으로 떨어질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곽재규 열사는 고 김주익 열사가 죽은 지 보름 뒤 11미터 아래 도크 바닥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김주익 위원장이 열사가 되고 난 뒤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더니…. 두 분이 친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따라 죽기까지 할 줄이야.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곽재규 열사도 몰랐을 것이다.
곽재규 열사는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우리는 내세울 것도 없다. 주익씨하고 창수씨야 내세울 거라도 있지만은 우리는 그런 것도 없다.” 갑순씨는 다른 열사들의 식구를 위로하며 자신의 슬픔을 애써 접으려 하지만, 내세울 게 있고 없고가 중요하랴. 모두 한 길에 섰던 동료들이고, 모두 지금은 없는 망자들인데.
남편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할까. 노조활동 하지 마라는 잔소리도 안 하고, 벌거벗고 대로에서 춤을 추라고 해도 추겠고, 그보다 더한 일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 아무리 애타게 간절하게 빌고 또 빌어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갑순씨는 힘이 빠진다.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간다.
갑순씨는 이제 남편을 잊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 두 딸들 키우고 살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리고, '열사 마누라' 자리도 보통 힘든 자리가 아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일전에 만난 배달호 열사 부인 말이 백번 천번 수긍이 간다. 조합원들이 “형수요 옷이 좋네요” 해도 신경이 쓰이고, 집에 찾아 온 조합원들이 “형수요, 이 화분 오데서 났소, 꽃이 예뿌네” 한마디 해도 걸린다. 그말이 맞다.
한진에 들어가서 작업복 입은 아저씨들이 줄서서 집회하는 것만 보면 그 안에 남편이 있는 것만 같아, 추모제다 행사다 좀 안 가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어린 경민이도 아빠 회사 아저씨들 안 만난다고 억지를 부리고 난리치다가도 “우리가 너무 안 가면 아저씨들이 못해줘서 그런 줄 알고 신경 쓰겠제?” 라며 아빠 동료들 걱정을 하는데 엄마이고 아내인 갑순씨가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남편은 떠나면서 숙제까지 주고 간 것이다.
갑순씨가 남편 얘기를 한참 하다 박창수 열사 부인 기선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늙은 나도 이래 남편하고 정을 못 떼서 이 난린데 젊어서 남편 잃고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표정이다. 결국은 말이 입 바깥으로 나왔다. "동생도 진짜 대단하다. 아이고 내 진짜 이 바보들(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열사)을 만나기만 해봐라. 가만히 안 놔뚤끼다. 다 주 뜯어놓을 끼다. 노조고 뭐고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노?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 바보들은 뭐 하고 있실꼬? 또 노조 한다고 저거끼리 토론하고 있겄제?”
잊고 싶다는 건 살기 위한 버둥거림일 뿐이다. 갑순씨는 곽재규 열사를 보내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있다. 그나저나 한진 노조의 열사님들 큰일이다. '열사 마누라들' 중에서도 '왕언니', 박창수, 김주익 열사에게는 형수님이 되는 갑순씨가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 각오를 하셔야겠다.

"엄마, 아빠는 이거 안 좋아해"
혹시나 올지 모를 남편 동료들 생각해 음식장만에 신경쓰는 남은 아내
아침10시, 경민이는 학원으로 간다. 남포동에 있는 영어학원이다. 경민이가 며칠 학원에 나가지 않자 뉴스에 나오는 그분의 딸인 줄 알고 있던 학원 원장선생님이 “니는 평생 반값만 내고 다니라”고 말씀해주셨다. 좋으신 분이다. 하지만 조금은 걸린다.
경민이는 경주대학교 한약재개발학과에 수시로 응시해 합격통지서를 받아놓았다. 아빠도 없는데 학교 졸업하면 어쨌든 취직을 해야 된다고 엄마가 고르고 골라 선택한 과다. 경민이도 만족한다. 경민이는 유한양행이라는 회사에 취업하고 싶다.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을 많이 하는 회사로 알고 있다. 노사갈등도 없단다. 아빠처럼 죽은 열사 아저씨들도 없는 회사란다.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회사가 어디 있나.
아빠에 대한 자부심? 아빠 딸로서 휼륭한 사람 되기? 지금 경민이와 영욱이에게는 그런 건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아빠가 그립고 보고 싶을 뿐이다. 아빠가 없는 이 슬픔의 시간들을 어떻게 견딜까.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문제다.
경민이가 나가자 동생 영욱이는 혼자 텔레비전을 본다. 엄마가 제사음식 준비를 하다 영욱이를 불러내신다. 명태인지 대구인지, 아무튼 전을 부칠 포에 밀가루를 입히라고 하신다. 영욱이는 쪼그리고 앉아 밀가루를 묻히다 말고 갑자기 큰 발견을 한 듯 “엄마, 아빠는 이거 안 좋아해” 한다. 효녀다.
“하, 맞다. 너거 아빠는 제사 음식도 안 좋아하는데 우째 이래 빨리도….” 남편이 제사음식을 안 좋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딸을 기특해하면서도, 갑순씨는 제사음식을 많이도 준비한다. “며칠 전 회사에서 추모제를 해서 조합 사람들이 집에까지야 오시겠나?” 하면서도 혹시나 싶기 때문이다. 남편과 관련된 일은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은 갑순씨.
영욱이는 괜히 심통이 나는지 얼렁뚱땅 해놓고는 휑하니 제 방으로 들어간다. 영욱이 책상의 책꽂이에는 중학교 때 아빠와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그 옆에는 금속연맹이 아빠에게 준 노동해방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책상 위로 햇빛이 비친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갰다.
아빠를 몹시도 사랑했던 열사의 딸들도 언젠가는 이 슬픔을 이겨낼 것이다. 그리고 아픔도 서서히 아물어 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아빠를 잃은 두 딸들에게 어른들이 줘야 할 게 무엇일까. 슬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망각을 이길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빈 자리는 어떤 식으로든 채워지게 되어 있다. 슬픔이 바래 희미해진 그 빈 자리. 그 자리가 무엇으로 채워지게 될까. 자랑할 수 없으면 희망도 엷어지나니.
결국 체했다. 열사 기일날 정종 한병 들고 덜렁 찾아간 기자는 젯상에 오를 약밥을 먼저 먹고는 체했다. 아무리 열사가 착한 분이지만 기자가 반가울 리가 있겠나. 김주익 위원장이 크레인 위에서 120일이 넘도록 농성을 하고 있어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다가 죽어야 찾아오는 까마귀떼 같은 기자들 아니냔 말이다.
남편을 보내고 '투사'가 된 아내…"엄마 피구할 때처럼 최루탄 피해야 돼!"

지금부터 21년 전인 1984년, “내 한 목숨 희생되더라도 더이상 동료기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박종만 열사가 분신, 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내 인식씨는 '투사'가 됐다. 이소선 어머니,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면서 민주통일운동연합,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서 활동했고, 박종만추모사업회를 이끌며 전국회사택시노조 설립투쟁을 벌이고, ‘운수노보’를 발행하는 등 어쩌면 먼저 가신 열사보다 훨씬 더 엄청난 활동을 해 왔다.
박종만 열사가 분신했던 1984년 큰아들 병권이는 열살, 작은아들 순권씨는 여덟살이었다. 그러나 두 형제를 기다리고 있던 상황은 비슷한 나이 때 아빠를 잃은 박창수 열사의 용찬이와 예란이와는 또 달랐다. 아버지는 분신하고, 어머니는 먼저 가신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투사'가 됐다. 형제들은 일 나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다 울다 지쳐 잠드는 최소한의 '호사'도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는 시위만 해도 구속이 되는 80년대였다. 게다가 유가협 어머니들은 얼마나 열심히 싸웠나. 시위대 맨앞에서 “나를 죽이고 가라”는 게 어머니들의 공식구호였고, 유치장에 끌려가는 건 그야말로 밥먹듯이 자주 겪는 일이었다.
어린 형제, 병권이와 순권이는 저녁이면 어머니께서 혹여나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적어주신 외가집 전화번호를 꼭 붙들고는 ‘오늘은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오실까', '혹시 경찰서에 끌려가신 것은 아닐까?’ 하며 겁에 질려 있어야 했다.
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을 무렵,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병권이는 이렇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최루탄이 날아오면 피구하듯이 잘 피해? 아빠도 없는데 엄마마저 죽으면 우리는 고아가 되잖아?” 운동을 좋아해 늘 친구들과 어울려 밖으로 다녔던 순권씨와 달리 병권씨는 집에서 홀로 어머니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형으로서 동생을 보호해야 된다는 책임감까지 안아야 했던 병권씨.
형제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어머니의 늦은 귀가만은 아니었다. 경찰들은 수시로 집에 들어와 집안 온 구석을 자기들 마음대로 뒤졌다. 어린 병권씨는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비상사태에 대비한 몇몇 전화번호를 암호로 만들어 벽에 적어 놓기도 했을 정도다.
평행선 긋게 된 모자…"아우님들, 어예 새 생활 찾으소"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간 병권씨는 어머니에게 요구하고 반항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우리를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어. 가족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해? 그런데 엄마마저 왜 그러고 다니는 거야. 우리가 얼마나 지옥 같은 줄 알어?”
이미 투사가 된 인식씨에게 아들의 이런 모습은 이해가 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찌 하여, 자식과 부모의 자리가 이렇듯 바뀌었단 말인가. “그건 니네들이 감당할 몫”이라는 '투사'가 된 어머니의 단호함과 “이제 제발 좀 고만하라”는 큰아들의 절절한 요구는 평행선을 긋기만 했다.
이미 투사가 된 인식씨이었지만, 인식씨도 엄마이고, 아내였다. 큰아들이 자신을 몰아세울 때면 인식씨는 자식들 몰래 남편 생각을 하며 우는 것 이외에는 달리 마음을 추스릴 길이 없었다. “왜 나한테 이런 고생을 시켜. 당신 진짜 너무 하다.”
이럴 때면 모든 게 힘들어진다. 열사가 있는 곳이면 달려가 가족들을 일으켜 세우고 열사투쟁을 함께 하도록 하는 것을 마땅히 할 일로 여기고 또 그렇게 해 왔지만, 사실 이게 사람으로서 정말 하기 힘든 일이다. 차라리 남편, 아빠 멀쩡히 있는 사람들에게 투쟁하자고 호소하는 게 마음이 덜 불편하지…. "아픔이 묻어져야 하는데 자꾸만 되살아나게 만들잖아. 어느 순간 그게 참 싫고 힘들었어."
어쩌면 나 혼자 감당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인식씨는 노동열사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많은 택시쪽 열사들의 부인들에게 새인생을 찾도록 권하기 시작했다. “내가 힘들어서 가라고 했다. 니네는 이 짐 짊어지고 말고 가라고 했다. 죽은 사람 인생도 중요하지만 산 사람 인생도 중요하잖아?” 해 본 사람은 안다. 열사 부인으로, 투사가 되어 사는 것이 자기를 죽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임을.
인식씨는 유가협과 택시노조 활동을 하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를 만났고, '비판적 지지'를 넘어 '절대적 지지'를 하게 됐다. 1987년 대통령선거 때는 연설원으로도 활약했고, 1991년부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의를 받아들여 민주당의 당직자로 일한 뒤 지난해 퇴직했다.
"엄마 대단해요, 고생 많이 하셨어요."…"고맙다 애들아, 아빠 뜻 반은 이뤘어"
민주당 당직자가 된 노동열사의 부인. 여기에 대한 인식씨의 생각은 확고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보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고, 백기완 선생님도 잘 알지만 독자후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인식씨는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한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당선돼 정권교체를 이루어냈고,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을 마련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적어도 남편의 뜻은 최소한 만큼은 이루어놓았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국가유공자법안과 공원묘지법안인데 이것도 곧 되지 않겠냐는 게 인식씨의 소망이다.
그래서 감히 물었다. 박종만 열사는 노동열사인데,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통해 남편의 뜻을 이어갈 수는 없었느냐고. 그러자 '역전의 용사'는 웃으며 답했다. “민주화가 중요했어. 그리고 내가 보기에 노동당도 특별한 게 없어. 아주 조금은 나을 수 있지는 모르겠다.” 기자는 민주노동당 당원이지만, 이 대목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우리는 언제 노동자의 힘으로 박종만 열사에게 빛나는 훈장을 바칠 수 있을까.

박종만 열사의 큰아들 병권씨는 삼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사업 준비를 하고 있다. 작은아들 순권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호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태권도, 유도 등 운동을 해 온 것을 살려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아들 순권씨는 “아버지가 분신하신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며,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아버지였을까” 하는 생각에 원망도 많이 했다고 솔직히 말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친구들에게 적당히 숨기고 지내왔단다. 친구들집에 가서 친구 아버지를 보면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아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형은 집에서 어머니는 일찍 들어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저는 운동을 해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해서 집에 없었어요. 운동을 했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몰랐고요.”
곁에 있던 인식씨가 다시 큰 아들 얘기를 한다. “그래서 큰애가 더 힘들었거야. 그때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동생도 없고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인식씨는 작은아들보다 피해의식을 더많이 갖고 있는 큰아들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 가슴이 아픈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요즘에는 큰아들 병권씨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엄마가 대단하다"며, "고생 많이 하셨고, 존경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
남편 뜻을 잇기 위해 자신만 희생한 것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아들들까지 희생시키게 된 인식씨. 그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밤마다 피눈물을 흘렸을 게다.
노동운동은 이렇게 열사의 피를, 열사 가족의 눈물까지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으며 자랐다. 이런 노동운동, 진보정치운동이 ‘망쪼’가 들었다는 얘기까지 듣고 있으니, 열사 볼 면목이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인식씨 앞에서 '왜 민주노동당이 아니냐'고 강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까지 죄송하다.
이런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 ‘선수’ 인식씨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아들들이 장가 갈 때가 되니까 내가 걱정이야. 내가 혼자 살고 있으면 아들들이 신경 쓸 것 아니야. 엄마 안 됐다고. 나는 그렇게 되면 자존심이 너무 상할 것 같아서 어디 가서 혼자 살 생각도 하고 있어.” 아이고 어머니….
열사의 아이들, 박창수 열사의 아들 용찬이(20)와 예란이(17), 곽재규 열사의 두 딸 경민이(19)와 영욱이(16), 그리고 박종만 열사의 두 아들 병권씨(31)와 순권씨(29). 이들은 이렇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남들에게 말 못하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는 어떻게 풀어질 수 있을까.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운동은 그리고 진보정치운동은 이렇게 밀린 숙제가 많은 것이다.


두번째 사진밑에 오자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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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아빠가 돌아오신다면, 술 드시고 밤새 붙잡고 얘기를 하셔도 다 들어드리고, 머리카락 흘린다고 잔소리 하셔도 냉큼냉큼 줏어 치우고, '짠돌이'라고 놀려 먹지도 않고, 아빠가 좋아하셨던 칼국수, 수제비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고 같이 먹고. 그리고…. 그런데 아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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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큼냉큼 줏어 치우고..
->.........주워........
-삼성에한맺힌여자 박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