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법원은 “종교·양심의 자유가 국방·병역의 의무보다 우월한 가치라고 할 수 없다”며 이들의 유죄를 속속 확정했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도 지난해 8월 종교나 양심상의 이유로 병역의무를 기피하는 사람을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한 현행 병역법 88조 1항1호에 대해 재판관 7대2의 의견으로 합헌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헌재, 신성한 국방의무 강조
이뿐이랴. 분단된 나라, 남과 북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나라.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거부한다는 것은 국민임을 포기하는 무모한 행동으로 치부된다. 반공·반북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진정한 남자가 된다.” 남자다운 남자, 사나이로 취급받기 위해서는 군대를 다녀와야 했다.
그것도 특공대나 해병대면 더할 나위 없다. 술자리에서도 군대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감히 방위병 출신은 이야기에 낄 수도 없다. 씩씩하고 패기에 넘치는(?) 사나이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계급사회, 군대의 질서는 철저한 ‘상명하복’이었고, 2~3년 군 기간 동안 '사나이'는 그렇게 길러졌다.
80년대 소위 ‘운동권’ 학생들은 대개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느라 군대를 거부할 기회가 없었다. '빵잽이'들은 군대에서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강제징집'과 그에 뒤이은 '녹화사업'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몰아넣었다. 1988년까지 ‘전방입소 반대투쟁’이 전개됐지만, 그것은 병역거부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고, 많은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군대에서 감시와 폭력, 억압과 굴종의 고통스런 기억의 파편들을 남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병역거부란 일부 특정 종교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시간은 흘러 바야흐로 21세기. 종교적 사유가 아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흐름이 생겨났다. 또 불교 신자 오태양씨에 이어 지난달에는 가톨릭 신자로는 처음으로 고동주씨가 병역거부를 선언해, ‘병역거부’ 논란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병역거부 수감자들에 대한 면회 등과 병역거부 상담 등도 더욱 체계화하고 병역거부, 대체복무 등에 대한 여론대응도 적극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최근 한국국방연구원이 조사한 설문결과는 대체복무에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군 간부와 사병, 징병검사 대상자 등을 주대상으로 했고, 1천여명의 일반국민 설문의 한계가 있음을 짐작케 하지만 대응은 미흡했기 때문이다.
대만 등 이미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의 사례를 보면 ‘병역기피 악용’과 군 복무자의 ‘상대적 박탈감’ 등의 이유가 아직도 나오고 있다. 그는 ‘대체복무’를 가능케 할 법제도적 투쟁도 강조했다. 민주노동당이 지난해 10명의 의원들로 '대체복무제도'를 핵심으로 한 병역법개정안을 냈고, 열린우리당의 임종인 의원도 병역법개정안을 제출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비종교적 사유 병역거부 17명
20여명도 채 안 되는 숫자. 2000년 이후 종교적 사유가 아닌 일반 병역거부자는 17명이었다. 96학번인 나씨가 병역거부를 결정하게 된 계기도 쉽지는 않았다. 감옥에 대한 두려움,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 '빨간딱지'가 주는 사회생활의 제약 등. 학생운동을 통해 단련된 그였지만 조직적인 운동도 아니고 개인의 소신과 용기가 더욱 필요한 방식은 생소했다.
병역거부 선언 이후 3년여의 과정은 더욱더 자신을 가다듬는 계기가 되었다. 보석기간 중 이라크에 ‘인간방패’로 들어가는 등 분쟁지역에서 몸을 던지는 평화운동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려는 종교인들의 모습은 경이롭게 비춰졌다. 수감생활도 마찬가지였다. “군대도 안 갔냐.” “군대를 갔다 와야 남자가 된다.” “비겁하게 너만 편히 살라는 거냐.” “빨갱이 새끼. 북한에 가서 살아라.” 사회에서 듣는 욕들이 감옥이라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점점 신뢰를 쌓아갔다. 닭장 속 닭들처럼 비좁은 시설에 많은 이들이 수감되면서 나타나는 문제, 의사 4명이 3천여명의 재소자를 돌봐야 하는 비정상적인 의료시설 등. 일반사범과 같이 있으면서 재소자 인권의 중요성도 새삼 다가왔다. 감옥 안에서 음식, 쓰레기, 옷, 편지, 신문배송 등 허드렛일은 교도소측이 보내는 신뢰의 표시이기도 했다. 병역거부자들이 보통 그런 일을 맡았다.
특히 교도소내 돈 문제, 물품관리 등 민감한 사안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교도소의 접견, 영치 등을 담당하고 있다. 수십년 동안 그들을 접한 뒤 교도소측은 ‘절대 손 안 댄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2003년 이들은 교도소 내 종교집회까지 얻을 수 있게 됐다. 병역거부자들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처럼 일방적인 순응은 체질에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과 갈등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나이가 어린 데다 같이 고생을 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또한 그들의 역사와 의식을 존중하는 이유도 있었다. 2000년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과 평화 인권운동의 흐름도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면 흔들릴 때가 많죠. 심리적 불안감이 커질 때마다 종교인들의 신념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전세계 양심적 병역거부자 94%가 한국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서 만난 병역거부 동료들은 단연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었다. 현재 1천여명이 전국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이 정도까지 감옥에서 신뢰를 얻기까지는 여호와의 증인 선배 신자들의 타협 없는 종교적 신념이 밑거름이 됐다. 최초의 병역거부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9년 여호와의 증인 신자 38명이 병역거부를 이유로 체포된 것이다. 옥지준 일가는 3대에 걸쳐 28년 동안 투옥되었고, 이들의 기록은 ‘독립운동사’에 남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달랐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 국방군 양쪽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70년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군사주의는 그들을 ‘이단’, ‘몰상식한’, ‘반국가’ 종교집단으로 낙인찍었다. 일체의 상징과 우상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교련수업’은 수난이었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 집단”이라는 마타도어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한 고난은 계속되었다.
“60여년 병역거부 역사 속에 외국에 나가거나 고인이 되신 분들도 있죠. 추산하면 1만여명 정도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 보도봉사팀의 홍영일씨(양심적병역거부자수형자가족모임 대표)는 1990년 병역거부로 안양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은사인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우리사회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스펙트럼입니다. 대체복무도 없이 실형을 선고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획일, 집단, 형식적 민주주의 사회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홍 대표는 기자와의 만남에서 논리정연하고 차분하게 병역거부 논리를 펼쳐나갔다. “모두가 병역거부를 하면 어떻게 하냐, 나라가 무너진다고 걱정하지만 소수(자)의 문제입니다. 이기적인 면피 가능성도 우려하지만 군 면제가 아닌 5년이고, 10년이고 대체복무를 하겠다는 것이죠.”

지난 9월15일 현재 병역거부자는 1,186명. 이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 신도는 1,174명에 이른다. 아제르바이잔, 앙골라, 아르메니아, 싱가폴, 터키 등 7개국에 총 72명이 수감되어 있는 것에 견줘 엄청난 숫자다. 전세계 수감중인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94%가 한국에 있는 셈이다. “병역거부가 여호와의 증인 전유물로 인식되었으나 양심적 병역거부가 꾸준히 생기는 것은 긍정적입니다. 국가주의, 획일화에서 다양성의 사회로 건강해지고 있다는 지표이죠.”

전국시대 ‘반전평화’ 주장한 묵가처럼
무엇이 이들을 ‘병역거부’로 이끌고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 ‘사해동포’, ‘정치적 중립’ 등 이들의 핵심 교리는 타협을 불허했다. 복학의 어려움, 대기업의 취직제한, 국가공무원 5년간 응시제한, 회계사 등 출소 후 3년간 시험제한 등등의 불이익도 이들의 종교적 신념을 꺾지는 못했다.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노동운동의 가르침이 있듯 우리는 ‘국경없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메시아로 삼으려는 무리에 대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예수께서 말하셨듯 우리는 초기 기독교 삶을 중시합니다.”
그들은 정치나 군인, 경찰, 고위공무원 등의 직업은 피하고 있다. 교단의 강요나 출소 이후 지원이나 후원도 없다. 철저히 개인의 결단과 신념의 문제였다. “무심한 측면도 있지만 돈 문제는 교회 내에서 금기시하기 때문에 직업알선 등은 공식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교회규모는 대형화를 피하기 위해 100여명 신도 수준을 유지한다. 장로도 신도들의 헌금으로 생활하지 않고 자원봉사 개념이다. ‘십일조’라는 강제적인 헌금도 지양한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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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군에는 가야지. 군대에 좋은 것도 많은데.” 노동운동가조차 ‘병역거부’ 서명을 찜찜해하던 기억을 떠올리는 나동혁씨. 그의 마지막 말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현실이 고단하더라도 안주하지 말자.” 부국강병,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노동계급의 ‘성찰’과 ‘연대’의 정신이 또 한번 절실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1만여명에 달하는 병역거부 전과자들,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던 가혹했던 국가주의, 지금도 매일 2명꼴로 구속되고 있는 병역거부의 행렬…. 그후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뜨거운 이슈이며 해결되지 않은 과제이다.
2004년엔 7월과 8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각각 병역거부 관련 사건에 대해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들을 내렸다. 이로서 헌법재판소 결정 뒤로 미뤄졌던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이 속개되어 9월15일 현재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 1,186명의 병역거부자들이 수감 중이다.
이러한 사법부의 결정에 따라 이제 병역거부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은 국회로 넘어간 셈인데 작년 9월과 11월에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을 비롯한 22명의 국회의원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을 비롯한 10명의 국회의원이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 허용을 골자로 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하였다.
징병제가 어느날 아침 갑자기 사라질 수 없는 시스템이라 한다면 다양성을 존중하고 소수자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대체복무제도는 아주 훌륭하고 게다가 수십년간의 검증을 거친 지혜로운 제도이다. 서구에서는 평화에의 신념이 개념조차 모호한 국가적 이익을 이유로 철창에 갇힌다는 것에 꾸준한 문제제기를 한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으로 1900년대 초·중반 병역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헌법 및 각종 하위법을 통해서 인정함과 동시에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여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면서 국가와 개인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들을 마련하였다.
우리 사회는 대체복무제도를 말하면 늘 남북분단을 이유로 시기상조라고 하지만 영국은 홀로 독일과 세계대전을 치르던 1916년에 대체복무법을 도입하였고, 미국은 역사상 가장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대체복무를 시행하였다. 독일은 냉전구도가 강화되고 동서로 분단되어 있었던 1961년에 대체복무제도를 시행하였다. 과연 시기상조인가?
지금 국회에서는 정기국회가 한창이다. 병역법 개정안은 1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며 그 1년 동안 700명의 청년들이 감옥에 갔다.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을 되풀이 할 것인가.


http://www.jw.or.kr/ko/article/백종건-변호사는-왜-구치소에-들어갔는데도-이탈처리-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