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으로 숨지는 노동자가 전체 산재사망의 60%를 넘는데도, 우리 산업안전보건법 체계는 여전히 추락·끼임 같은 재래형 사고 예방에 머물러있다. 작업 현장에서 어떤 물질에, 어떻게, 얼마나 노출됐는지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면 직업성 질환 예방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20일 오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건강 유해물질 일터 관리체계 정립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을 규정 준수 중심 구조에서 유해위험 통제 중심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전문가들은 기존 산업안전보건 관리체계가 ‘서류가 맞는지만 보는 제도’에 갇혀 있으며 실제 위험을 줄이는 통합적 관리 시스템이 부재하다고 진단했다.
유해위험 관리의 선순환이 끊긴 현행법 체계
2021년부터 올해 6월까지 5년간 폐암 산재로 숨진 학교급식 노동자는 14명에 달한다.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던 조리노동자들의 폐암이 뒤늦게 산재로 인정되기까지, 현장의 위험은 수년 동안 방치돼 있었다. 조리흄이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 이미 확인됐지만, 국내 산업안전보건법 체계는 그 노출을 제대로 측정하지도, 체내 부담을 추적하지도 못했다.
박정임 순천향대 교수(환경보건학)는 현행 법제도의 구조적 결함을 조목조목 짚었다. 박 교수는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은 노출 감소 → 체내 부하 감소 → 질병 감소라는 예방의 기본 지표를 입증할 수 없는 구조”라며 “관리 대상의 공백, 형식적 작업환경측정, 유해물질 정보의 환류 부재, 연구·감시 체계의 단절 등 여섯 가지 구조적 한계가 누적돼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대표적인 사례로 학교 급식노동자의 폐암을 들었다. 조리흄이 1급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국내 작업환경측정은 조리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들이마신 기름 연기를 포착하지 못했다. 측정은 환기를 극대화한 특정 시점에 이뤄졌고, 결과는 늘 ‘기준치 이하’였다. 하지만 조리대 앞에서 20년 넘게 일한 노동자들은 하나둘 폐암 진단을 받았다. 서류상으로는 ‘안전한 조리실’이었지만, 노동자의 폐 속에서는 질환이 자라고 있었던 셈이다.
박 교수는 “이처럼 ‘측정 결과는 적법하지만 노동자는 아픈’ 역설이 반복된다”며 “작업환경측정, 건강진단, 위해성 평가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시스템이 돼야만 실제 질병 감소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규정을 지켰는가”에서 “위험을 통제했는가”로
박미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실장은 산업안전보건법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주문했다. 박 실장은 “지금 법의 초점은 ‘법을 지켰는가’에 고정돼 있다”며 “이제는 ‘현장에서 유해위험을 실제로 관리했는가’를 묻는 법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는 화학물질을 포함한 직업성 질환을 예방하려면 현장의 위험을 △파악 △평가 △통제 △기록 △점검하는 ‘유해위험관리 5단계 순환체계’를 법에 명확히 넣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어떤 물질이 쓰이고, 얼마나 위험하며, 어떻게 줄였는지, 그 조치가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를 하나의 흐름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고가 나기 전에 위험을 줄이는 사전예방형 통합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의 법제도가 이 흐름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두성산업·대흥알엔티 사건이 대표적이다. 두 사업장 모두 노동자들이 발암물질과 유해가스에 노출됐고 사망사고까지 이어졌지만,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는 ‘노출 관리가 실제로 실패했는가’가 아니라 ‘안전보건 문서가 갖춰져 있었는가’로 갈렸다.
두성산업에서는 작업현장에 유해가스가 가득 차 있었지만, 회사는 “위험성평가 문서와 안전보건관리규정이 존재한다”는 이유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흥알엔티 역시 노동자 여러 명이 독성물질에 노출됐음에도, 회사가 제출한 서류상 절차가 갖춰졌다는 이유로 중대재해처벌법 혐의 상당 부분이 무죄로 판단됐다. 실제 위험을 통제하지 못했는데도, ‘서류가 있다’는 이유로 처벌을 피한 셈이다. 박미진 실장은 “현행 구조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이 사전 예방 법제가 아니라 사고가 난 뒤 문서 책임만 묻는 사후 책임 규정으로 작동한다”고 비판했다.
“관리 대상 확대, 중소기업 혼란 우려 … 단계적 접근 필요”
재계는 새로운 관리체계 도입 취지에는 동의하면서도 현장의 감당 가능성을 우려했다. 백세언 한국경총 안전보건본부 선임위원은 “관리 대상 물질을 약 2천300종으로 급속히 확대하면 중소기업은 준비 기회조차 없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며 “단계적 확대와 이행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백 위원은 또한 작업환경측정과 특수건강진단 제도에 대한 유연화 도입을 제안했다. 일정 기준 이상으로 위험을 잘 관리하는 사업장에는 측정 주기 완화 등 인센티브를 부여해 자율 관리체계를 유도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반면 노동계는 포괄적 작업환경측정과 보편적 위험관리 방식을 강력히 요구했다. 현재순 화섬식품노조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유해성이 확인된 물질이라면 어떤 사업장이든 동일한 수준의 통제가 가능해야 한다”며 “지금처럼 메탄올 사고가 나야만 관리대상이 되는 ‘사후형 목록제’로는 절대 예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조덕연 안전보건공단 산업보건실장은 현실적인 문제를 우려했다. 국내 사업장의 약 97%는 소규모 사업장으로, 대부분 자체적인 화학물질 관리 능력을 갖추기 어렵다. 조 실장은 “현행 제도의 효과가 나타나려면 결국 이 97%를 어떻게 끌어올리느냐가 핵심”이라며 “공단은 소규모 사업장의 맞춤형 관리 역량을 키우기 위해 ‘화학물질 관리 역량강화 프로그램’(RIAC)을 확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컨설팅과 자율 관리 역량 제고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