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국제노동기구(ILO)가 예술·엔터테인먼트산업 노동자의 불안정한 노동조건과 사회보호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단체교섭과 사회적 대화를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정책지침을 발표했다. 이번 지침은 영화·음악·방송·시각예술·디지털미디어 등 급성장하는 문화산업 전반에서 기본적인 노동기준이 여전히 충분히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ILO는 새로 발간한 <예술·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괜찮은 일자리 실현하기: 단체교섭의 역할>(Achieving decent work in the arts and entertainment sector: The role of collective bargaining)에서 창작노동이 국가 문화역량의 핵심인데도 노동자들이 저임금, 장시간 근로, 예측 불가능한 고용, 사회보장 미적용 등 다양한 ‘괜찮은 일자리’ 결핍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정책지침은 전 세계 50여개 단체협약과 국가 사례를 분석해 예술·엔터테인먼트산업에서도 단체교섭이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독일에서는 2024년 영화산업 단체협약을 통해 주당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촬영현장 근로시간 상한을 강화했으며 연장근로수당도 인상했다. 벨기에는 공공재원이 투입되는 공연 현장에서 프리랜서 예술가와 기술인의 최소수수료를 보장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세네갈은 음악산업 최초 단체협약을 통해 최저임금, 사회보장, 원스톱 기여 시스템을 마련해 비정규 노동자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였다. 미국에서는 2021년 SNS 기반으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와 인플루언서에게도 단체협약을 통해 복지혜택이 확대되는 성과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산업 구조가 파편화되고 프리랜서와 자영예술인이 많은 문화산업에서도 단체교섭이 공정한 임금기준과 작업조건을 확립하는 핵심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ILO는 공적 재원과 보조금이 예술·엔터테인먼트 분야 근로조건 개선을 이끄는 중요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공연·영화·전시 등 공공지원이 제공되는 영역에서 단체협약 준수 여부를 지원 기준으로 삼을 경우 최저보수·안전기준·근로시간 규정을 산업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국가에서는 문화예산 배분 때 단체협약 준수, 성평등 기준, 안전관리 체계 등을 평가항목에 포함하며 ‘공정한 창작환경’ 조성을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번 지침은 기술 변화 대응도 중요한 과제로 제시한다. 프랭크 하게만 ILO 부국장은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이 창작방식과 유통구조를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규범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단체교섭은 AI가 콘텐츠를 자동 생성하거나 플랫폼이 알고리즘으로 성과를 평가하는 시대에 예술가와 자영예술인을 보호하는 핵심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특히 AI 생성물 저작권, 보수 기준, 플랫폼의 불투명한 수익배분 구조, 알고리즘 평가 방식 등 새로운 위험요소를 단체교섭과 사회적 대화를 통해 규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ILO는 이번 지침이 2023년 열린 ‘예술·엔터테인먼트 일의 미래’ 기술회의 결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설명하며 각국 정부와 사용자·노동자 단체에 법제도 정비, 사회적 대화 촉진, 노사단체 역량 강화 등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마르게리타 리카타 ILO 전문가는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안전하고 공정한 노동조건이 보장될 때 지속될 수 있다”며 “산업의 미래를 위해 노동자와 사용자가 단체교섭 테이블에 함께 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ILO는 예술·엔터테인먼트산업이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으로 성장하려면 ‘좋은 작품’만큼이나 ‘좋은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창의산업의 성장은 개별 예술가의 재능뿐 아니라 그들이 안전하고 존중받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는 메시지다.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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