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진우 권리찾기유니온 위원장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현실 공감형 드라마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디어에서 조명받지 않던 ‘김부장’이 드라마의 중심에 서자 언론의 주목도 이어진다. ‘김부장’은 그동안 드라마에서 주연을 도맡아 온 ‘2030 청년’이거나 중년 여성이 아니다. 통신사 대기업에서 25년을 재직한 50대 남성 정규직 노동자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이라는 조건은 아닐지라도, 김 부장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느끼는 직장인들이 많다고 한다. ‘중산층의 위기’ 같은 식상한 접근을 떠올릴 수 있지만, 힘겨운 직장 생활을 버텨낸 뒤 맞이하는 그 ‘끝’은 누구에게나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다.

임원 승진에서 누락되는 순간 김 부장의 직장 내 역할과 가치는 급격히 하락한다. 회사는 직접적인 해고 대신 희망과 명예 같은 단어로 치장한 조기퇴직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대기업들이 이를 도입한 것은 오래된 일이고, 이제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만큼 흔한 수법이다.

극 중 김 부장은 “대기업 25년차 부장으로 살아남아서 서울에 아파트 사고 애 대학까지 보낸 인생은 위대한 거야”라고 자평한다. 이는 허세가 아니라 사실 최상위급 스펙이다. 김 부장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에게 직장 생활의 ‘끝’은 어떨까. 김 부장과 입사 동기로 만년 과장인 허 과장의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다.

회사는 허 과장을 울릉도로 발령해 평소 업무와 무관한 위험한 맨홀 작업에 투입한다.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고 모멸감을 유도하는 것은 ‘저성과자 괴롭힘 해고’의 전형적 방식이다.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살아난 허 과장을 두고, 부정적 평판을 막으려 급급한 사측의 행태 또한 소름 끼치게 전형적이다.

김 부장이 좌천돼 안전관리팀장으로 배치된 공장에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근무한다. 이들에게는 애초에 승진 사다리 같은 게 없으니 퇴직 프로그램도 전체를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공장을 폐쇄할 때 한 번에 모두 처리하지 않고, 회사는 순차적으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아침 체조 시간에 잡담했다고 벌점을 주거나, 각티슈에 이름을 넣어 뽑힌 사람을 자르는 방식은 맥락도 기준도 형편없다. 누가 먼저 잘릴지 모르는 불확실성은 직원 간 불신을 키우고 집단 저항의 힘을 꺾는다.

“회사는 늘 회사편”이라는 대사처럼, 회사를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정하는 일조차 회사 몫이 된다. 인사팀은 회사 전략에 따라 기준을 짜내려 고심한다. 근로기준법을 지키거나 지킨 척이라도 하려면 탈나지 않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퇴직 대상으로 설정된 이들은 처지가 다르더라도 모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로기준법 없이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4대 보험 대신 사업소득세(3.3%)가 원천징수되는 처지라면 법정 퇴직금은커녕 실업급여도 없다. 퇴직 프로그램이나 특별한 구조조정 전략을 강행할 필요도 없으니 위로금 같은 것도 없다. 비인간적이고 충격적인 수법으로 무리할 필요조차 없다. 이야기가 단순해져 재미없으니 원작과 드라마 각본에서 일부러 뺀 것일까.

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거의 모든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한다. 김 부장이 본사와 공장에서 대면한 청소노동자, 구내식당 조리사는 용역업체로 고용된 3.3 노동자일 확률이 높다. 퇴직한 김 부장이 급여액을 따져본 배송기사·퀵서비스·대리기사는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에 등장한 골프강사는 최근 3.3 노동자 법률구제에 참여 중이다.

이들을 대표해 마루시공 현장에서 ‘김반장’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제목에 올렸다. 호칭은 달라도 이들의 수는 직장 다니는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선다. 직장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인물들의 삶을 실제처럼 다루려면 이들을 아예 보이지 않게 감출 수는 없다. 노동자가 아니게 감춰진 위장고용의 실체를 모르거나, 혹은 바닥 노동자의 현실을 민감하게 드러내고 싶지 않더라도 말이다.

김 부장과 달리 김반장은 지금 어떤 드라마든 시청할 여유가 없다. 김반장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제작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잘 알면서도 인기 드라마에 편승해 김반장 이야기를 꺼내본 이유다. 세상 속 주인공들이 진짜 자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권리찾기유니온 위원장 (redr404@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