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먼지’ ‘조용한 살인자’. 석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폐암과 악성중피종이라는 비극이 떠오른다. 수많은 희생 끝에 석면으로 인한 폐암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직업병의 대명사’가 됐다.
그런데 이 비극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숨겨진 형제’가 있다. 석면이라는 동일한 원인에서 비롯됐지만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던 또 다른 질병, 바로 ‘후두암’이다. 석면은 폐뿐만 아니라 우리가 숨 쉬고 말을 하는 길목인 후두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폐로 가는 길목, 후두를 먼저 공격한다
우리가 들이마신 석면 가루는 코와 입을 거쳐 후두를 지나 폐에 도달한다. 이 과정에서 날카로운 석면 섬유가 후두 점막에 박혀 수십 년 동안 지속적인 염증과 세포 손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석면 후두암’의 발병 기전이다. 석면 폐암과 공격 방식과 경로가 사실상 동일하다는 뜻이다. 과학적으로도 확인된다. 유해물질에 많이, 오래 노출될수록 질병 위험이 비례해 증가하는 것을 ‘양·반응 관계’라고 한다. 특정 질병이 우연이 아닌 직업적 요인 때문에 발생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산재 인정의 핵심 요건이다. 여러 연구에서 후두암 역시 폐암과 마찬가지로 석면 노출량과 노출 기간에 비례해 발병 위험이 뚜렷하게 증가하는 양·반응 관계가 확인됐다.
흡연과 석면의 ‘상승효과’, 위험은 곱셈이 된다
“내가 담배를 많이 피워서 생긴 병인데…” 많은 노동자들이 이렇게 지레짐작해 산재 신청을 포기한다. 실제로 흡연이 후두암의 주요 원인인 것은 맞다. 그러나 산재보험은 그 질병이 ‘업무 때문에 생긴 것’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흡연과 직업적 유해물질이 만나면 위험은 단순히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몇 배로 증가한다. 이를 ‘상승효과’라고 한다. 흡연의 위험이 1이고 석면의 위험이 1이라고 했을 때 최종 위험은 2가 아니라 3이나 4 이상으로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즉 ‘흡연 때문에 생긴 병’이 아니라 ‘흡연 때문에 직업적 요인이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한 병’으로 봐야 한다.
최근 법원과 근로복지공단에서도 흡연을 직업적 노출의 위험을 극대화하는 ‘가중요인’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흡연 경력이 오히려 증거가 되다
빌딩 관리소장 사례
최근 산재로 인정된 한 건물 관리소장 A씨의 사례는 장기간 흡연력이 오히려 후두암을 직업병으로 인정받는 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A씨는 2008년부터 11년간 건물 관리소장으로 일했다. 겨울철이면 주말도 없이 밤새 보일러를 돌보고, 평소에는 배관수리와 조명 교체 등 건물의 궂은일을 도맡았다. 그러다 2019년 8월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했고, 2020년 2월 후두암을 최종 진단받았다.
그의 주된 작업 공간은 환기가 거의 되지 않는 지하 3층이었다. 배관이나 조명을 수리하기 위해 천장을 뜯고 교체하는 일이 잦았고, 낡은 천장재에는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이 포함돼 있었다. 그는 방진마스크조차 착용하지 않은 채 석면 가루를 들이마셨다.
A씨에게는 20년의 흡연력이 있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단순한 개인적 요인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흡연이라는 개인적 위험요인에 더해 장기간 누적된 직업적 석면 노출이 암을 유발한 결정적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흡연이 석면의 발암성을 더욱 증폭시키는 상승효과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후두암은 명백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됐다.
석면만이 아니다, 일터를 점검하라
후두암 위험은 석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코 안의 암을 유발하는 목재 분진과 포름알데히드, 폐암의 원인이 되는 결정형 유리규산(돌가루)과 디젤엔진 배출물질 등, 호흡기를 통해 들어오는 다양한 유해물질이 후두에 직접적인 손상을 남길 수 있다.
문제는 이 물질들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가구와 인테리어 작업장, 터널과 건물을 시공하는 건설 현장,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자동차 정비소와 기계 공장이 바로 그 위험의 현장이다. 이처럼 여러 일터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먼지와 가스가 수십 년에 걸쳐 조용히 몸속에 쌓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목소리에 이상이 느껴지고 그 원인을 개인적 습관에서만 찾고 있다면, 이제 시선을 일터로 돌려야 한다. 수십 년간 들이마신 공기 속에 당신의 목소리를 앗아갈 진짜 원인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박도연 노무법인 이산 암산재연구소장 (pdy869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