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쿠팡의 ‘새벽배송 금지’ 논란을 계기로 충돌했다. 최근 민주노총과 택배노조가 제안한 ‘새벽 0~5시 배송제한’을 두고 CBS 토론에서 벌어진 일이다. 두 사람은 이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으며, 그에 따라 SNS는 실시간으로 장혜영의 지지자와 한동훈의 지지자로 양분됐다. 개인적으로 이 ‘논쟁’이 유의미하지 않다고 느꼈던 이유는 한동훈의 ‘화법’ 때문이었다.

한동훈은 SNS 논쟁에서 “왜 하필 쿠팡의 새벽배송만 금지시키려 하느냐”고 했다. 새벽에 하는 노동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한다면 ‘모든’ 노동을 금지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다는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는 그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거부했을 것이기에, 그 자체가 이미 ‘모든 노동을 금지할 게 아니라면 쿠팡의 새벽배송도 건들지 말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새벽배송 금지에 관한 논의를 하면서 “그렇다면 모든 새벽노동을 금지해야 하느냐”는 반문은 논점이탈이며, 구체적인 논의를 어렵게 만든다.

특히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방식의 발화는 정치인이라면 지양해야 할 화법이다. 정치의 묘미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양자택일의 사이, 그 어느 지점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있다. 바로 거기에 정치적 리얼리즘이 존재한다. 누구의 이해관계를 대변할지, 어떤 가치를 우선할지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마주해야 한다. 그러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발화에는 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예컨대 ‘모든 새벽노동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식의 조야한 규범론만 남을 뿐이다.

실제 토론도 예상대로 지지부진했다. 사회자마저 균형감과 중립성을 상실한 채 논의가 진행됐고, 사실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조차 도출하지 못한 채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다 끝났다. 한동훈은 노동자의 건강권 침해라는 구체적 상황의 해결책에 관해서 단 한 마디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소비자와 배달노동자 당사자들이 원한다면 제3자인 민주노총이 왜 개입하느냐 △민주노총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새벽배달만 문제 삼는 것 아니냐 △새벽배달을 없애면 물류창고 노동에 과부하가 걸린다는 논변을 반복하며, “민주노총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굳이, 콕 집어서 쿠팡의 새벽배송을 문제 삼았다”는 기상천외한 주장을 폈다. 공당 정치인으로서의 역량이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토론이라 부르기도 민망했지만, 여기서 하나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바로 ‘현장’의 노동자들과 그 외의 사람들을 분리·대립시키는 어떤 ‘구도’ 말이다. 이 구도에서 ‘현장’이라는 기표는 실제 노동자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현장에서 일하는 민주노총 택배노조조차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상한 정책을 펼치는 집단으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조차 이런 대접을 받는다면, ‘현장’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구도에서 정치에 대한 혐오와 멸시를 읽어내는 것이 과한 해석일까. 정치를 ‘우회’해 현장의 실무자나 노동자의 목소리를 더 많이 반영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해관계 조정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생략하려는 ‘효율성 우위’의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이때 좌파·지식인·노조 등 사회적 중간집단은 정치적 과정의 주체가 아니라 경제성장의 ‘장애물’로 지목될 뿐이다. 최근 최장집 교수가 지적한 ‘정치 없는 민주주의’라는 한국 정치의 특질이 바로 여기서 작용하고 있다.

이 ‘위험천만한’ 민주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도약은 어렵다. 당장 특별한 대안은 없더라도, 상대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 지적 성실함,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주장을 수용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때다.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fpdlaks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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