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노동부 본부 건물은 ‘프랜시스 퍼킨스 빌딩(Frances Perkins Building)’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별칭이 붙은 사연은 이렇다.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루스벨트가 산업재해 정책 전문가로 알려진 여성 프랜시스 퍼킨스를 찾아가 노동부 장관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을 때, 퍼킨스는 장관직 수락의 전제 조건을 내걸었다. 주 40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실업보험제, 아동노동 금지, 사회보장법 제정, 공공고용서비스, 건강보험 도입을 추진할 테니 대통령이 이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퍼킨스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퍼킨스는 노동부 장관으로 워싱턴에 입성하며 “나는 신과 루스벨트 대통령, 그리고 수백만 명의 잊힌 평범한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려고 워싱턴에 왔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그는 12년의 임기 동안 자신이 내건 정책들 가운데 건강보험제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과제를 제도화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뉴딜 개혁의 핵심은 사실상 퍼킨스의 의지와 집념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1944년 한 잡지는 ‘루스벨트의 뉴딜이 아니라 퍼킨스의 뉴딜’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 1930년대 뉴딜을 떠올리면 미국 노동부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여성 장관이었던 퍼킨스보다 남성 대통령 루스벨트의 이름이 먼저 떠오른다. ‘퍼킨스 빌딩’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도 1980년에서야 이뤄졌다.
위대한 역사적 공헌 뒤에는 언제나 여성이 있었지만, 현실의 기록에서는 남성들만 알려지거나 부각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뉴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생물학의 가장 빛나는 업적 인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떠올리면 대부분 왓슨과 크릭이라는 두 남성 과학자의 이름을 기억한다.
하지만 사실 그 발견의 이면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영국의 탁월한 여성 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가 공들여 찍은 DNA의 X선 회절 사진 덕분에 두 남성 과학자는 이중 나선 구조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3년 그들이 역사적 논문을 발표할 때는 프랭클린의 허락조차 받지 않은 채, 그녀의 사진을 게재했다.
불행히도 이런 사례는 기후과학에서도 존재한다. 이산화탄소가 온실효과로 인해 지구 온도 상승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년 전, 1856년에 탁월한 여성 과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보다 3년 뒤인 1859년 아일랜드 물리학자 존 틴들(John Tyndall)이 온실효과를 발견했다고 알고 있다.
어쩌다 이런 오류가 생겼을까. 미국의 과학자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유니스 푸트(Eunice Foote)는 1856년, 유리 실린더에 건조한 공기·습한 공기·수소·이산화탄소를 각각 채워 햇빛에 노출시켰다. 그 결과 이산화탄소와 습한 공기를 넣은 실린더가 가장 많이 데워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그는 “내가 발견한 태양 광선의 가장 큰 효과는 이산화탄소에서 나타나며, 이 가스로 이루어진 대기는 지구에 높은 온도를 부여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인류 최초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 증가가 지구 온난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푸트는 자신의 연구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도록 남성 과학자 조지프 헨리를 통해 발표해야 했다. 그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 결과는 무시됐다. 그녀의 존재는 무려 160년 가까이 잊혀졌다가 2011년 석유지질학자 레이먼드 소렌슨이 그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현대의 영향력 있는 기후과학자 케이트 마블(Kate Marvel)은 유니스 푸트를 회상하며 “그 누구도 이산화탄소와 온난화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전에 푸트는 홀로 그 일을 해냈다”며 그녀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이어 “기후변화 경고를 묵살당한 수많은 기후과학자 중 최초의 인물이 바로 유니스 푸트였다”고 덧붙였다.
지금 세계는 기후위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초강대국 지도자와 맞서 싸워야 하는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서 기후변화를 “멍청한 사람들이 만든 예측에 근거한, 전 세계적으로 자행된 가장 큰 사기극”이라 호통쳤다. 이렇게 기후 대응을 위한 협력과 진전은 곳곳에서 장애물을 만나고 있다.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민의 지혜와 참여가 필요하다. 특히 기후재난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녹색전환연구소 소장 (bkkim21kr@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