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산재사고를 막겠다며 SPC가 약속한 안전투자금 1천억원이 노동자 안전과 무관하거나 회사가 당연히 사용해야 할 분야에 집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건물의 소방·전기안전관리 대행료와 육아지원 3법 설명회에 안전투자금을 지출했다. 안전투자금으로 운영한 안전경영위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중대재해가 재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SPC는 2022년 평택 SPL 제빵공장 끼임 사망사고로 전사적인 불매운동이 일자 대국민 사과를 한 뒤 올해까지 1천억원을 들여 그룹 전반의 안전 경영 시스템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예산이 제대로 쓰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며 SPC가 ‘죽음의 공장’ ‘피 묻은 빵’ 같은 오명에서 벗어나기에는 요원하다는 지적이다.
관련법상 의무배치해야 하는데
‘자동제세동기 렌트비’도 안전투자
9일 <매일노동뉴스>가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박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통해 입수한 ‘SPC그룹 안전투자 계획 이행 현황 집행내역 조사표’와 ‘안전경영위원회 활동 경과’ ‘SPC 안전경영 혁신방안 대국회 보고서’ 등을 확인한 결과 SPC는 1천억원 투자를 약속한 뒤 올해 상반기까지 총 969억원가량을 집행했다. 약속했던 금액을 대부분 쓴 셈이다. 안전설비 확충에 254억4천만원, 고강도·위험작업 자동화에 278억1천만원, 작업환경 개선에 209억7천만원, 장비안전성 강화에 172억6천만원, 안전문화 개선에 54억2천만원을 사용했다.
이 대목만 보면 돈을 제대로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세부 내역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본적으로 사용해야 하거나 관련법에 따라 반드시 집행해야 하는 돈을 써놓고 안전투자로 꾸민 항목이 눈에 띈다. 비알코리아 김해공장·신탄진공장·음성공장·던킨 사송허브키친 등에서는 소방안전관리 대행료나 전기안전관리비 등이 매월 지출됐다. 건물주가 해야 하는 소방시설·전기설비 점검을 외주화한 뒤 이 비용을 안전투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소방·전기안전관리 대행료는 계열사마다 투자 항목을 다르게 분류했다. 던킨은 김해공장의 전기안전관리비를 기타 항목의 진단·자문으로, 파리크라상은 한남별관의 소방안전관리 업무대행료를 안전설비 확충 항목의 화재 등 기타안전사고 예방으로 집행했다. 계열사들의 제멋대로식 예산 집행을 방증한다.
소모품이나 노후화 장비 교체를 ‘투자’로 집행한 사례도 많았다. 안전화, 반창고, 쿨파스, 미화노동자 경량모, 귀마개 리필, 근무자 반팔티, 운영팀 법인차량 타이어, 휴게실 의자 등이 SPC 전 계열사를 망라하고 안전투자 예산으로 집행됐다. 중대재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당연히 갖추거나 구비해야 하는 것들로, 투자로 보기는 힘든 항목들이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응급의료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다중이용시설에서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자동제세동기(AED) 렌트비도 SPC에서는 안전투자가 됐다. 비알코리아 양재사옥의 의약품도 안전설비 확충 예산으로 집어넣었다. 심지어 비알코리아 서울지점에서는 2023년 8월 고용노동부 점검을 대비한 안전점검을 기타 항목으로 약 235만원 지출하기도 했다.
안전경영 자문하라고 위촉했는데
‘노사관계 전망’ 강의하고 강사비 챙겨
방향성을 잃은 SPC 계열사들의 안전투자는 컨트롤타워인 안전경영위원회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SPC는 2022년 11월 안전경영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그룹의 산업안전·노동환경·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활동의 심의·자문을 맡겼다. 이 예산 역시 SPC 안전투자 1천억원의 기타 항목으로 집행됐다.
SPC는 정갑영 연세대 명예특임교수에게 안전경영위원회 위원장을, 천영우 인하대 교수(환경안전융합대학원), 정지원 법무법인 율촌 상임고문, 조현욱 변호사(The조은합동법률사무소)에게 위원을 맡겼다. 안전공학 전공자인 천 교수를 제외하면 산업안전 관련 전문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인사다.
이들이 직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할 때는 회당 300만원의 강의료가 안전투자 예산에서 따로 지급됐는데, 산업안전과 상관이 없는 주제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2023년에는 정지원 위원이 그룹 인사·노무 부서를 상대로 ‘국내 노사관계 주요 흐름 및 법·제도 변화, 국내 노사관계 주요 쟁점’을, 2024년에 ‘총선 이후 주요 노동개혁 추진 및 이슈 점검, 노사관계 현주소 및 쟁점 분석’을 강의했다.
정 위원은 박근혜 정부 당시 고용노동부에서 공정인사(일반해고) 지침과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지침 시행 등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주도했고 문재인 정부에서 퇴직했다. 올해도 정 위원은 ‘2025년 노사관계 전망과 주요 판례 해설’을 강의했다. 특강에는 ‘육아지원 3법 개정 주요내용 및 모성보호 프로그램 운영 사례’와 ‘통상임금 대법원 전원 판결 이후 기업들 상황’이 포함됐다.
안전경영위 3년 활동 ‘무용’ 또 사망사고
SPC삼립 사고 뒤 노사점검하니 미비점 무더기
SPC는 외부위원 4명에게 매월 1천200여만원의 자문료를 지급했다. 1인당 매월 300만원 꼴이다. 올해 7월까지 총 약 4억1천억원이 집행됐다. 안전경영위원회의 활동은 주로 회의와 현장점검, 특강, 현장직원 간담회로 이뤄졌다. 정기회의를 통해 안전경영위원회는 ‘안전경영로드맵 이행을 위한 그간의 노력과 향후 계획’ ‘사별 화재안전진단 결과 및 조치 현황 점검’ 등을 제출해 달라고 각 계열사에 권고하기도 했다.
안전경영위원회의 권고가 효과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SPC는 지난 5월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끼임 사망사고가 발생하자 다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윤활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회전 중이던 컨베이어 프레임과 고정된 기둥 사이에 상반신이 끼어 숨진 사고였다.
사고 이후 SPC는 SPC삼립·샤니·파리크라상·비알코리아 등 24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노·사 합동 긴급 안전점검을 실시했다. 긴급 안전점검은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각 사업장별로 짧게는 하루, 길게는 3일이 걸렸다. SPC는 긴급 안전점검 결과 ‘컨베이어 안전커버 설치 필요’ ‘컨베이어 하단부 끼임 위험’ ‘배수구 주변 미끄럼 위험’ 등 ‘미비사항 568+@건이 발굴’됐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안전경영위원회가 3년 동안 활동했는데도 불과 최대 3일의 긴급 안전점검에서 적지 않은 안전 부적합 사례가 발견된 격이다.
무능한 안전경영위원회 체제에서 SPC의 1천억원 안전투자도 공염불이 됐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박해철 의원은 “안전경영위원회의 자문료에 SPC가 긴 시간 큰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투자와 현장 개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후진국형 산재사고가 끊이질 않았고, 지금도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라며 “올해 국정감사에 출석하게 될 도세호 SPC 대표에게 안전경영위원회의 보여주기식 활동과 1천억원 대국민 투자 사기극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본지는 SPC쪽에 안전투자 1천억원 세부 내용과 관련해 통화를 시도하고 메시지를 남겼으나 회신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