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애진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최근 ‘저속노화’ 연구로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는 한 노년내과 교수의 경험담은 우리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며 과로와 불규칙한 생활에 시달리던 그는 퇴사 이후 일정한 생활 리듬과 건강한 습관을 회복하면서 비로소 체력과 정신적 안정을 되찾았다고 했다. 잦은 당직, 수면 부족, 습관성 음주로 이어지는 ‘노화의 악순환’을 몸소 겪었던 그는 삶의 속도를 늦췄을 때 비로소 본래의 건강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개인의 체험담을 넘어 모든 노동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누구나 ‘저속노화’라는 삶의 방식을 실천할 수 있을까?

노화를 늦추기 위한 ‘저속노화’ 생활방식은 이론적으로 누구에게나 유효해 보이지만, 현실 속 많은 노동자들에게는 요원한 이야기다. 2024년 기준, 한국 임금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1천859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중 가장 긴 수준에 속한다. 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모두 포함한 수치로 우리 사회의 장시간 노동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한 노동유형일수록 삶의 리듬은 더 쉽게 무너진다. 플랫폼을 통해 일하는 배달·운송 노동자들은 고정급이 거의 없거나 적어 수입을 보전하려면 훨씬 긴 노동시간을 견뎌야 한다. 소규모 자영업자 역시 하루 대부분을 생계유지에 쏟는다. 이 과정에서 일정한 휴식이나 운동을 계획하기는 매우 어렵고 일과 여가의 경계마저 흐려진다. 결국 건강을 지키기 위한 습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산업보건학 및 사회학 분야에서는 과중한 노동, 불규칙한 노동이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는 과정을 오랜 기간 연구해 왔다. 이들 연구에 따르면 장시간 노동과 만성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사람들은 이를 해소하려는 본능적 반응으로 술, 담배, 고칼로리 음식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대처 방식은 일시적 위안을 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정신건강과 신체건강 모두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노동환경의 구조적 특성 그 자체에 있다. 건강을 위협하는 노동조건이 불건강한 습관을 유발하는 구조 속에서 개인의 '의지'나 '노력'을 통해 건강을 지키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산업재해 보상 실무와 법원의 판결은 질병의 책임을 노동자 개인에게 돌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근로복지공단의 업무상 질병 판정서나 법원 판결문은 “오랜 흡연 습관, 지속적 음주, 고혈압·당뇨 등 기존 질환 관리 미흡” 등을 상세히 언급하며 이를 근거로 질병이 업무와 무관하게 자연적으로 악화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를 되풀이한다. 판결문 곳곳에서도 “망인은 담배를 하루 15개비 정도 30년가량 피워 왔고” “해당 업무에 종사하지 않았더라도 흡연, 비만, 고지혈증으로 인한 발병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지속해서 비만이 있고, 흡연, 과도한 음주를 했음이 확인된다”라는 식의 문구가 관용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판단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구조적 맥락, 즉 과로, 스트레스, 불규칙한 노동 등의 업무환경이 불건강한 습관 형성의 주요 원인이 됐을 가능성은 간과된다. 또한 개인 책임론이 앞세워지면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한 취약 노동자들이 업무상 질병 인정을 받는 것은 한층 어려워진다.

과로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기 삶의 속도를 조절할 권리를 빼앗긴다. 업무량과 근무시간이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부에서 강제되는 한 개인의 자기관리만으로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일 뿐이다. 사회적 안전망과 충분한 휴식시간, 안전한 노동환경이 전제돼야만 건강한 생활습관을 선택할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삶의 속도를 늦추는 선택은 일부 특권층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하는 모든 사람이 사회적 안전망 속에서 삶의 리듬을 조절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저속노화’는 공허한 구호가 아닌 실천 가능한 삶의 방식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단지 ‘저속노화’가 아니라 ‘저속노동’이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불건강한 습관을 낳고 그 습관이 노화와 질병 발병을 촉진하는 악순환 속에서 불건강의 책임을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하는 현재의 업무상 질병 판단 방식 역시 근본적으로 재검토되고 개선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