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청을 폐지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지난 26일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하는 검찰개혁이 드디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민주당의 오랜 지론이었던 수사와 기소의 분리는 검찰청이 공소청으로 전환되고 중대범죄수사청이 신설됨으로써 제도적으로 구현될 수 있게 됐다. 이쯤에서 검찰개혁의 본의를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검찰개혁을 왜 하게 됐으며, 검찰개혁의 본질은 무엇인가. 검찰개혁의 성공 유무를 판별할 때의 기준으로 우리는 무엇을 제시해야 할까.
일찍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 <성공과 좌절>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민주주의는 ‘계약’이었다면 내게 민주주의는 ‘구도’였다”고 말한 바 있다. 김대중에게 있어 어떤 체제를 선택하고 만들지가 중요했다면, 반대로 노무현에게는 국가와 개인, 세력과 세력 등의 관계를 나타내는 ‘구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 점에서 노무현은 체제의 교체를 지향했던 386 운동권 세대나 그 이전의 건국의 정치를 지향했던 세대와는 다소 이질적인 정치인이었다.
노무현의 정치적 문제의식의 근간에는 한국의 역대 권위주의적 정권들이 자의적으로 행한 국가폭력에 대한 강한 부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의 국가폭력의 행사가 자의적이었을뿐만 아니라 범진보진영에 대해서 편향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봤다. 그렇기에 그의 정치적 목표는 이 ‘기울어진 구도’를 바로잡고 국가폭력의 ‘정당한’ 행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조하는 것이었다. 즉, 국가폭력기구와 시민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조정할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수단이었다.
노무현은 관계자 및 관련 기관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대화’를 지향했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진행되었던 친일청산, 과거사바로세우기 등의 작업은 결코 당시의 야당 세력, 한국 보수 진영에 대한 흠집내기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던 국가폭력기구들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폭력행사의 ‘도덕적 정당성’을 회복하기를 꾀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검찰개혁에서도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일관되게 적용돼 나타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이러한 정치적 중립에 대한 강조가, 곧바로 “검찰의 민주화”로 이어질 것이라 “나이브”하게 생각했다고 반성하면서 참여정부의 검찰개혁은 정치적 중립의 확보를 검찰권력의 분산과 결합시키지 못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지금 진행되는 검찰개혁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검찰개혁이 국가폭력기구와 ‘시민’이 맺는 관계의, 그 구도의 변화를 꾀하는 데 본의가 있다면, 시민의 자기보호 권리의 보장이라는 측면도 함께 봐야 한다. 검찰개혁을 ‘제도’적인 개혁에만 한정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노무현 정부하에서 추진되었던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제도의 도입, 사법부 개혁 등은 검찰권력에 대한 제도적 분산 외에도 시민의 자기보호권 강화라는 또다른 맥락하에서 추진됐다. 검찰권력에 대한 최종적인 견제는 다른 기관의 견제 등 보다도 그 기관들의 견제를 추동하는 '동력'으로서의 개인의 자기보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내 권리를 보호받고자 하는 것만큼 확실한 동력은 없다.
지금 우리가 되돌아봐야 하는 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새롭게 이뤄지고 있는 제도개혁이 검찰권력의 분산에만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컨대 이번 개정안으로 검찰은 1차 수사기관이 송치하는 기록만 받아 기소 여부를 판단하게 되었다. 1차 수사기관에 대한 견제 및 통제 기능이 형해화해 버린 것이다. 보완수사권마저 박탈당해버려 사실상 경찰에 대한 수사통제를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 신설될 중대범죄수사청은 아예 1차 수사기관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수사권의 분산으로 인한 기관 간의 견제보다는 개인의 자기보호의 제한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앞으로 남은 1년 동안 국가폭력기구와 시민의 관계를 어떻게 조정할지에 주목해야 한다. 검찰개혁의 성패는 이를 기준으로 판별될 것이다.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fpdlakstp@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