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의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대규모 단속 사건을 보며 대서양시대의 ‘해적’을 떠올렸다. 마커스 레디커의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는 해적, 선원, 대서양 등에 대한 탐구를 통해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해양사 연구를 접목한 걸작이다. 그는 이 책에서 17~18세기 대서양을 공포에 떨게 했던 해적이 사실은 당대에 발흥하고 있던 상업자본주의의 산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거기서 노동하던 이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컨대 당시 ‘배’는 단순히 이동수단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공장’이었으며 동시에 ‘감옥’이었다. 상업을 주관하는 떠도는 공장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라는 특질이 배를 상업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주요한 생산수단이자 일종의 ‘기계’로 만들었던 것이다. 가혹한 규율과 치밀한 감독 하에 손발을 맞춰 이 기계를 움직이던 선원들은 국제노동시장에서 나오는 화폐임금과 교환됐던 최초의 ‘임노동자’였다. 해적은 단순히 무법자가 아니라, 배를 움직일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을 지닌 임노동자였으며 무엇보다도 국가로부터 면허권을 발급받기도 하는 등 합법성과 불법성의 경계에 놓여 있던 이들이었다.
이 해적에 주목한 또 다른 이는 바로 칼 슈미트다. 그는 전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을 대상으로 한 뉘른베르크-도쿄 재판을 지탱한 ‘평화에 대한 범죄’의 기원을 해적에 대한 처벌에서 찾는다. 영미법에서 해적은 ‘전 인류의 적’으로 규정돼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시체는 모두가 볼 수 있게 전시됐다. 슈미트는 연합국이 독일, 일본 등을 평화를 어지럽힌 해적이자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려 한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마루야마 마사오가 동물적으로 감각했듯이, 해적을 교수형에 처한다고 해서 평화가 정착되지는 않았다. 전후의 인류는 독일과 일본이라는 해적을 처벌하지 못한 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진영으로 나뉘었으며, 한국전쟁을 매개로 반공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자신이 해적이었다는 사실을 점차 망각했다. 영미세계와의 충돌은 일왕을 속였던 일부 ‘무법자’의 실수였으며, 그 무법자는 도쿄재판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이상 전후의 일본은 다시금 영미친선의 노선을 따라 문명국으로서의 항로를 헤쳐 나갈 것이었다. 이 영미친선이라는 관념이 오늘날까지도 얼마나 잘 작동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트럼프의 관세협상에서 보게된다.
많은 논자가 일본의 대미협상이 성공인지 아닌지를 두고 논쟁하지만 협정문이 있음에도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별 의미가 없다. 미국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영미친선에 일본은 굴복했고, 한국은 굴복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다. 한중일이 연대해 대항하는 듯했지만 각개격파되는 이 상황은 전후에 한국전쟁을 계기로 반공주의가 작동하며 영미친선 노선이 정착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언제까지고 영미친선이라는 배 혹은 감옥에 갇혀 노동을 제공하다가 영미세계는 ‘인류의 적’인 해적으로 몰려 교수형을 당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이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도 한일 양국은 여전히 친미노선만이 답이라, 배에 갇혀 있자고 외친다. 심지어 대통령이 미국의 수장과 얼마나 친한지를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는 걸 보고 있자면 한심한 걸 넘어서 슬퍼질 지경이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주체 형성의 계기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마커스는 이 선원, 해적, 노예 등의 다양한 사회적 기원을 지닌 이들이 배를 매개로 ‘공통의 세계’를 창출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버마스가 강조하는 부르주아적 공론장이 내륙의 우아한 정치클럽, 의회 등을 매개로 형성됐다면, 선원들이 창출하는 “프롤레타리아 공론장”이란 노동과 폭력을 매개로 배 위에서, 바다 위에서 형성됐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노예선을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노예를 세계사의 주체로 새롭게 파악하게 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인식 전환의 계기가 존재하는가. 숭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한일연합체에 기초한 지역적 자본주의의 형성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fpdlakstp@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