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중 공인노무사(노무법인 현장)

얼마 전 부당해고 사건을 수행했다. 사건을 맡기 전 상담 자리에는 해고된 노동자와 노동조합 간부가 함께 찾아왔다. 노조간부는 해고와 관련된 사실관계와 관련 자료를 꼼꼼히 설명했고, 해고가 얼마나 부당한지 목청껏 강조했다.

노동자 본인의 목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질문하면 작고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간단한 답변을 했지만, 그마저도 노조간부의 보충 설명에 금세 묻히고는 했다.

“노무사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서면을 작성하고, 노동자의 확인을 받아 노동위원회에 송부한 뒤 다시 연락하겠다는 문자를 짧게 남겼다. 그에 대한 답변이 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는 문자였다.

서면에 만족했다는 뜻일까 싶어 뿌듯하면서도, 경의를 표한다는 낯선 표현에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상담 때부터 줄곧 그 노동자와 나 사이에 형성돼 있던 거리감이 체감됐달까. 그 노동자가 더 당당하기를, 자신이 겪은 억울함을 더 표현하기를 내심 바랐지만, 계속 의기소침하신 느낌이었다. 문자에서 그가 선택하는 단어에도 의기소침함이 배어 있었다. 그래서 거리감이 더 느껴진 것 같다.

“결과에 상관없이 저는 앞으로도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군과 마음을 이어 갈 예정입니다. 좌절하지 않을 겁니다.”

다가온 심문회의 전날, 만날 장소와 시간을 문자로 안내해 줬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는 좌절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솔직히 좀 놀랐다. 그 다짐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민이 있었을지가 단번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법리와 증거에 몰두하던 시간 동안, 그는 노동자로서의 내면을 지켜내기 위해 부단히 투쟁해 왔음을, 그리고 그 싸움에서 조금씩 자신을 되찾아 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네요. 환영합니다.”

다행히 부당해고가 인정됐고, 그는 원직에 복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노조총회 교육이 잡혔고, 총회 뒤풀이 자리에서 그를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듣게 된 그의 환영 인사. 그의 언어는 이제 노조에 찾아온 노무사를 환영하는 당당한 노동자의 언어로 한 걸음 더 전진해 있었다.

알베르 카뮈가 남긴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말을 생각해 본다. 부조리를 직시하고 저항하는 자는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고, 그때 발견하는 건 자신 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저항하는 공동체의 존엄이라는 의미로 알고 있다.

그 뜻을 빌려, “투쟁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고 말해 보고 싶다. 부당함에 투쟁하는 노동자는 연대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존엄을 지켜낸다. 이번에 나는, 정체성 상실 위기에서 의기소침했던 사람이 투쟁을 거쳐 노동자의 언어를 되찾는 모습을 봤다. 그러나 한 사람만을 본 것이 아니라, 노조 가운데 ‘우리’로서 존재하는 노동자를 봤다. 그리고 그가 나를 환대해 줬을 때, 나 역시 노무사로서의 존재 의의를 확인받을 수 있었다.

계속 그렇게, 노동자의 옆에서 ‘우리’로 존재하기를 허락받는 한 사람이고 싶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