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석 환경정의 사무처장

규제개혁위원회라는 생소한 기구가 폭염 속 노동자를 보호하고, 화학물질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지키겠다는 노력을 가로막았다. 어떤 생명이 명멸한 이후에야 여론에 등떠밀려 규제를 강화했다. 규제개혁위의 존재이유를 묻는 연속기고를 싣는다. <편집자>

지난 7월, 폭염 속 건설현장에서 20대 청년 이주노동자가 첫 출근 날 쓰러져 숨졌다. 며칠 뒤 대형마트에서 일하던 60대 노동자도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 올 1월 폭염 속 노동자의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입법예고 됐으나, 규제개혁위원회가 이를 ‘과도한 규제’라며 두 차례나 관련 조항의 삭제를 권고한 결과였다. 기업의 부담을 이유로 안전장치가 무너진 탓에 노동자는 안전하게 일할 권리조차 지켜내지 못한 채 생명을 잃었다.

수천 명의 목숨과 건강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통해 우리는 화학물질 관리는 정보 확보에서 출발하며, 정보가 없는 물질은 곧 위험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런데도 최근 규제개혁위는 정보가 부족한 화학물질 관리 강화를 담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학물질등록평가법) 시행규칙을 “현장의 혼란”이라는 이유로 후퇴시켰다. 시민 안전을 위해 마련된 제도가 ‘규제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무너진 것이다.

정책은 사회적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책임 있는 행정의 출발점이다. 폭염 속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자는 사회적 합의는 이미 권고 사항으로 존재해 온 규정이다. 이번 개정안은 기후위기 속 노동자의 피해가 극심해지면서 잘 지켜지지 않았던 규정에 책임을 부과한 것뿐이다. 유해화학물질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자는 사회적 합의도 신규화학물질의 등록 기준이 완화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정보 부족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유해성이 미확인된 화학물질의 자율적 관리 방안으로 정부와 산업계, 시민사회가 2년 동안 공론장에서 논의한 합의 사항이었다. 그럼에도 규제개혁위는 이 모든 사회적 합의를 무시한 채 기업의 비용 절감 논리에 따라 정책을 흔들고 있다.

정책은 사회의 원칙을 반영해야 한다. 건강, 생명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비용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은 피해가 발생한 이후의 보상일 뿐이다. 그마저도 피해자의 상실과 고통을 온전히 메울 수는 없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정책은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우선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규제개혁위는 안전을 비용의 문제로 축소하고, 사람의 생명을 숫자와 경제적 부담으로만 계산하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정책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책은 후퇴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발전은 더 많은 권리를 보장하고, 더 안전한 제도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생명과 안전의 원칙이 담긴 제도가 ‘규제 완화’라는 이름으로 후퇴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제도의 변화를 넘어 사회 전체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어렵게 만들어온 안전장치를 허무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더 큰 위험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선택이다.

규제개혁위의 구성을 들여다보면 환경보건과 노동안전에 대한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다. 법과 규제 전문가만이 참여해 제도를 비용과 경제적 손익의 관점에서만 검토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제도가 단지 ‘돈으로 따졌을 때 기업에 얼마나 부담이 되는가’라는 시각에서만 평가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지금의 규제개혁위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빼앗고, 위험을 방치하는 걸림돌에 불과하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지금처럼 기업 편향적 시각에 매몰된다면, 국민은 계속해서 목숨을 잃고 사회는 참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규제개혁위가 아니라 ‘안전개혁위원회’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업의 이익이 아니라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두는 원칙에서 출발하는 제도와 행정이 우리 사회를 지켜낼 것이다. ‘생명·안전이 우선되는 사회’ ‘생명·안전을 지키는 안심사회’ 표현은 다르지만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생명’과 ‘안전’이다. 더 이상 규제 완화라는 이름으로 안전의 후퇴가 반복돼서는 안 된다. 국민의 생명은 그 어떤 비용보다도, 그 어떤 이익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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