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개혁위원회라는 생소한 기구가 폭염 속 노동자를 보호하고, 화학물질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지키겠다는 노력을 가로막았다. 어떤 생명이 명멸한 이후에야 여론에 등떠밀려 규제를 강화했다. 규제개혁위의 존재이유를 묻는 연속기고를 싣는다. <편집자>
우리는 다양한 화학물질을 사용하고 있다. 국내에서 상업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약 3만3천종이다. 사용량도 많다. 연간 7억톤의 화학물질이 유통된다.
이 중 상당수가 유해화학물질이다. 화학물질 사용량을 기준으로 할 때, 발암물질은 약 5%를 넘는다. 화학물질 수로는 발암물질이 약 3백종이다. 그럼 나머지는 발암성이 없는 안전한 물질일까? 아니다. 발암성 시험을 거쳐 발암성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 물질은 천개가 안 된다. 나머지 3만개가 넘는 물질들은 발암성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물질일 뿐이다.
발암성만이 아니다. 화학물질 제도 선진국인 유럽은 약 2만여종의 화학물질에 대해 유해성 정보를 확보했고, 그 중 신뢰할 수 있는 정보로 확정한 것은 5천종이 채 안 된다.
이조차도 유해성 정보를 모두 파악한 것이 아니다. 화학물질평가법(화평법)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화평법(REACH)도 연간 천톤 이상 사용하는 화학물질에 대해서만 인체유해성 정보 12가지를 모두 요구하기 때문이다. 연간 10톤 미만 사용물질의 경우 요구하는 인체유해성 정보는 2~3개에 불과하다. 인류가 아는 화학물질 유해성 정보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하지만 산업안전보건법과 화학물질관리법은 유해성이 확인된 물질에 대해서만 안전보건조치를 요구해 왔다. 안전보건관리에 거대한 사각지대가 있는 것이다. 바로 유해성 미확인 물질이다. 정부, 산업계, 시민사회, 전문가로 구성된 화학안전정책포럼에서 여러 해 논의 끝에 마련한 합의안의 핵심내용은 ‘유해성미확인물질에 대해서도 안전보건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No data, No market’, 즉 안전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다는 원칙을 구체화한 것이다.
화학안전정책포럼은 안전보건관리가 필요한 유해성 미확인 물질의 정의에 대한 논의를 1년 넘게 진행했다. 결국 필수적인 인체·환경 유해성 항목 5개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유해성 미확인 물질인 것으로 정하여 이를 화평법 시행규칙에 반영했다.
그러나 규제개혁위원회는 이 5가지 항목 중 ‘피부부식성’ 정보가 불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규제개혁위는 피부부식성이 왜 포함됐는지 알기는 했을까? 화평법상 연간 1톤 이상만 사용해도 제출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험항목이고, 화학물질 누출로 인한 인명피해와 산업재해의 80%가 피부부식 피해였기 때문이다.
규제개혁위가 포럼의 합의를 무시해야 할 정도의 구체적인 필요는 있었을까? 유해성미확인물질 관리방안은 환경부고시도 아니고 그저 안내서, 가이드일 뿐이다. 안 지켰다고 처벌하는 조항도 없다. 화학물질에 닿을 때 피부가 녹아내리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관리가 필요하다는 안내일 뿐이다. 이조차 불필요하다니, 피부부식성 정보가 없는 물질을 사용하다 피부가 녹아내릴 위험은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삼성전자 반도체 칩 공장의 사용화학물질 중 19%가 피부부식성 물질이었다. 반도체만이 아니다. 삼성전자 무선통신은 16%, 가전은 19%의 피부부식성 물질을 사용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인 1톤 미만 화학물질의 등록면제 조치로 인한 기업의 이익은 확실하다. 산업계의 주장에 따르면 건당 약 3천만원의 비용과 6개월~1년의 등록기간을 단축하는 이익을 300건이나 챙겼다. 앞으로도 매년 지속될 이익이다. 유해성미확인물질의 관리방안은 그런 규제완화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이었다.
이번 결정은 규제개혁위가 화학물질 안전보건 제도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회적 합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모르면 나서지 말아야 한다. 화학물질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규제개혁위는 없는 게 낫다. 모르고 위험한 결정을 내리는 규개위보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이 훨씬 더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