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노동권 연구활동가)

이번 주가 ‘광복 80주년’ 기념 주간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1945년 8월15일에 ‘해방’을 맞이했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부터 1948년 8월15일까지 근 2년11개월간 미군정 치하였다는 사실을 거론하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정병준 교수의 역작 <1945년 해방 직후사>를 보면 80년 전 여름의 급박한 나날의 한 장면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조선 주둔군 최고사령관 고즈키 요시오 중장이 미24군단 사령관 하지에게 보낸 전문 중에는 “조선인 폭도가 경찰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군수품 약탈과 파업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 수차례 나온다. 하지는 서울 입성 다음날인 9월9일 “군 정부가 남한에서의 유일한 정부이며, 기존의 각급 행정기관을 운영하는 기구”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일본 점령정부의 관리들을 유임시켰으며 경찰 등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했다.

구 총독부에서 노무행정을 담당하던 광공국 노무과는 미군정 하에서 노동조합(등록)계가 신설되며 그대로 활용됐다. 1945년 10월30일에는 미군정의 최초의 집단적 노동법이라 할 수 있는 법령 제19호가 공포됐다. 여기에는 “개인 또는 집단이 직업을 구하고 또 방해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방해하는 모든 행위는 불법”이며 “노동조건에 관한 모든 분쟁은 조선군정청에 설치된 조정위원회에서 해결하도록 한다. 분쟁이 노동조정위원회에 제소돼 이에 대한 결정이 있을 때까지 모든 분쟁당사자는 노동쟁의와 상관없이 생산을 계속해야 한다”고 규정됐다.

법령 제19호를 구체화해 노동부가 1947년 각 지방 노동행정 담당관에게 시달한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에 관한 건’에서는 “노동조합 또는 조합원의 다음과 같은 행위는 그 권한 이외의 것임을 이해할 것. 첫째, 기업주 또는 정당한 대표 혹은 그 대리인의 기업경영의 정당한 권리행사를 간섭, 억압 또는 강제하는 행위, 특히 피고용인의 채용, 해고 등 인사권은 기업경영권의 일부로 노동조합이 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할 것”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미군정은 노동쟁의를 불법화했을 뿐 아니라 식민통치시절의 노동통제제도도 유임시켰다. 일제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25년부터 조선에 적용한 치안유지법은 미군정 법령을 거쳐 대한민국 형법에서도 ‘업무방해죄’ 등 조항으로 계수됐다.

1953년 한국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은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제정했다. 노동 3권을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하지 않는 미국과 달리 대한민국 헌법은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을 제정헌법 당시부터 인민의 기본권으로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을 구체화해야 할 노동법은 일제 치하로부터 군정을 거쳐 계수된 바대로, 노동조합의 결격 요건에 관한 조항, 공무원, 공익사업 등에 대한 쟁의행위 금지, 합법적 ‘노동쟁의’에 대한 협소한 정의 조항 등을 존치, 확대시켰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은 대한민국헌법의 원칙에 따르는 하위법령의 정상화, 일제 식민통치법제로부터의 해방의 시작에 불과한 첫걸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사업주를 상대로 하는 노동 3권 행사를 불법화하지 않는 것, 노동조건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노동조건을 결정하지 않도록 기울어진 역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것은, 재계나 국민의힘의 주장처럼 위헌이 아니라 대한민국헌법으로의 복귀의 첫걸음에 다름 아니다.

윤애림(노동권 연구활동가, 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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