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구미의 한 아파트 공사장에서 베트남 이주노동자가 온열질환으로 사망했다. 이 가슴 아픈 기사를 읽던 중, 한 댓글이 눈에 띄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보다 더 더운 나라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충격이었다. 더운 나라에서 왔으면 더위로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 댓글은 이주노동자를 같은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환경에 맞게 설계된 기계처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극심한 더위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건 인간이라는 생물의 특성이지, 살아온 환경에 따라 그것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댓글을 한 사람의 망언으로만 치부해도 될까. 고민이 깊어졌다. 이 말은 어떤 배경에서 나왔을까, 유난히 이 사람만 했던 생각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키워온 구조적인 차별일까.
건설노조가 이주노동자 단속을 요구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주노동자들을 퇴출해야 한다고 집회를 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불법이냐 합법이냐를 따지기 전에, 함께 일하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건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는 노조조차도 혐오와 배제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은 황당함을 넘어 절망적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이주노동자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공장에서, 건설현장에서, 농촌과 어촌에서 그들의 손을 빌리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사업장 변경 제한, 열악한 숙소, 체불임금, 직장내 괴롭힘, 산업재해 등의 문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몇 년, 아니 몇십 년째 반복되는 현실이다. 고쳐야 한다는 말은 많았지만, 실제로 바뀐 것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주노동자의 인권 증진을 위해서는 제도 개선 못지않게 아주 중요한 지점이 있다. 이주노동자 문제는 결국 ‘우리 인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을 함께 일하는 같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를 돌리기 위한 외국인력, 언젠가 떠날 사람들, 떠나지 않으면 단속해야 할 대상들로 여기는 시선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제도를 고치고 법을 바꿔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 그 댓글에 담긴 말은 그저 그 사람의 몰상식함이 드러난 것만은 아니다.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대우해도 된다’는 구조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말이다.
이 사회가 말하는 이 ‘다름’으로 인해 이주노동자들은 건설현장의 가장 높은 곳에, 농촌의 가장 더운 곳에, 공장의 가장 위험한 기계 앞에 서 있다. 우리는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고 말하면서도, 그 일은 그들이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못하지만, 그들은 해도 된다’는 인식이 언제부터였는지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폭염으로 쓰러진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단지 한 사람의 비극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이주노동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노동자 내 차별이 얼마나 깊게 박혀 있는지 드러낸다. 우리는 이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주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그를 ‘우리와 같은 노동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불편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당당히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노동인권 실현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