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이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를 이유로 대통령제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듯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시대를 대비하겠다는 보수층의 정치적 노림수가 반영된 것이든, 7공화국 건설을 통한 원내 진출을 꿈꾸는 좌파 정당들의 희망의 발로든 간에 대통령제에 대한 부정은 어디서든 쉬이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주장들은 ‘제왕적 대통령제’와 ‘자유’가 양립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지만 그리 쉽게 단언하기 어렵다.

일찍이 미국의 대통령제를 연구한 제임스 M. 번즈는 <미국형 대통령제>라는 저서에서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모형으로 매디슨 모델(Madison Model), 제퍼슨 모델(Jefferson Model)과 더불어 제3의 모형으로 해밀턴 모델(Hamilton Model)을 제시한 바 있다. 제도적 견제와 균형을 중시하는 매디슨 모델이나 고도로 경쟁적인 양당제 하에서 다수결주의에 입각한 정부운영을 꾀하는 제퍼슨 모델과 달리 해밀턴 모델은 대통령이 입법부뿐만 아니라 대중과도 대립하며 대통령 자신이 생각하는 ‘국익’의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심지어는 독단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걸 선호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권한을 보다 넓게 활용해 통치하는 해밀턴 모델에서 대통령을 규제할 수 있는 건 제도적인 장치가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긴박한 사태나 정치권의 압력이었다. 급박한 현실에 맞서 대통령의 정력적이고 창조적인 행동을 옹호하는 해밀턴 모델은 이미 당대에도 전제적인 군주정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현대의 연구자들, 번즈와 같은 대통령 사가들에게조차 대통령의 그러한 권한 행사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목표와 관련돼 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의 사상사적 연구들은 해밀턴 또한 매디슨 등과 같은 다른 사상가 못지 않게 일관된 사유체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 해밀턴은 공화국에서 자유를 무너뜨릴 수 있는 최대의 위협은 자유 그 자체로부터 온다고 주장한다. 선동적인 정치인들과 그들을 따르는 열정적인 대중집단이 정치적 혼란과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고 결국 공화국의 자유를 무너뜨린다. 대통령과 국민간의 연대가 약화될지라도 대통령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해 공화정과 국익을 수호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자체가 전제적인 지배자로 전환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견제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탁월한 덕성을 지닌 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선출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주적인(Monarchical) 대통령과 공화주의적인 자유의 ‘양립’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앞장 서서 헌정질서를 파괴하려 했던 한국적 상황에서 해밀턴 모델이 지니는 함의는 무엇일까.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일시적으로 성립했던 촛불연합의 해체의 원인을 깊이 반성하고 있는 듯하다. 설사 지지자들의 기대를 배신하더라도 합리적·중도적 보수진영까지 포용해 중도적 촛불연합을 재건하고 그에 기초해 국내외적인 과제들을 행정적 역량으로 돌파하는 걸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로 여기는 것 같다. 민주당의 정체성을 ‘중도보수’로 규정하고 ‘먹사니즘’과 같은 조어를 내세우며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을 우선시하는 등 실용적인 행정 관리자의 포지션을 차지하려 하는 건 이런 맥락이다.

문제는 지지자들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을지다. 벌써 일부 지지자들은 보수친화적으로 변화한 그의 태도에 실망을 표하고 있다. 제퍼슨 모델로 권력을 쟁취한 뒤에 해밀턴 모델로 이행하려는 이재명 대표의 실험이 성공할지는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좌파 세력이 할 일은 이재명 전 대표가 제퍼슨 모델에 안주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이 돼야 한다. 대통령제를 거부하기보다는 제퍼슨 모델에 기초한 대통령제 운영이 매디슨 모델로까지 이행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야 한다. 무조건적인 제도 변화보다 현존하는 제도를 어떻게 더 잘 운용할 수 있을지 지혜를 모을 시기다.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fpdlaks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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