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4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이 선고되고 기쁨의 행진 도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인 이수기업의 해고노동자가 경찰에 연행됐다는 소식이었다.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갔다. 헌법재판관들이 선고를 내리기 위해 법정에 앉을 때,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은 원청에 고용승계를 요구하고자 현대차 모터쇼에 찾아가 피켓을 들었다(이수기업 하청노동자 정리해고 사안은 매일노동뉴스, “현대차 비정규직 ‘10년 헌신했는데, 하루아침에 내쫒겼다’” 참고).
구호가 적혀있는 손팻말을 채 펼치기도 전에 현대차 직원들의 폭력으로 손팻말은 빼앗겼고, 노동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현대차 직원에게 질질 끌려갔다. 노동자는 모터쇼를 구경 온 수많은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짓밟히고 내쫓겨졌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은 노동자를 잡아가라는 자본의 요청에 영문도 모르면서 순순히 그를 연행해갔다. 우리는 그날 윤석열을 끌어내렸고, 그와 동시에 어느 노동자는 자본에 의해 끌려 나갔다.
이쯤에서 묻는다. 세상을 바꾼 대통령이 있었는가? 어느 정권이, 어느 법이 나서서 세상을 바꾼 시절이 있었는가? 윤석열이 내려가도, 재판관이 파면을 선고해도, 정권이 바뀌어도 자본은 노동자를 쫓아낸다. 우리가 세상을 바꾼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고 나서서 구호를 외친, 손팻말을 빼앗기고 내쫓겨지더라도 다시 그 자리에 터벅터벅 돌아와 목소리 내어 구호를 외친 노동자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바꾼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책상 앞 높으신 법관이나 정치인들의 권력(power)이 아니라, 그들이 겁먹도록 거리에 나선 다수 민중의 힘(power)이 만든 것이다.
이번 파면의 결과도 그랬다. 2024년 12월3일부터 2025년 4월4일까지 123일 동안 세상을 움직인 건 어느 누구도 아닌 민중이었다. 탄핵 결정문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피청구인의 국회 통제 등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을 가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 (…) 덕분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이 가결됐다는 이유로 피청구인의 법 위반이 중대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그날 헌법재판소 앞, 수많은 법적 논거들이 쏟아지던 중 짧지만, 귀에 박히는 한 어구, “시민들의 저항 덕분”. 12월3일 당시 민중들이 국회 앞에 모여든 후에는 그들은 마치 담장을 넘는 국회의원을 지켜보고, 국회의 의결을 숨죽여 기다릴 뿐인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밤이 새도록 거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의 저항 덕분이었다. 지난 123일 동안 한국사회의 모든 움직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록 그토록 오랜 기간, 헌법재판관들의 입이 열리길 고대해야만 하는 아쉬운 조건이었지만, 4월4일의 선고 결과는 광장에 나온 우리 다수 민중이 만든 것임에 한 치의 의심이 없다.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에게 달려있다. 이제 대선이 시작되고, 새 정권이 온다. 대선이 오고, 새 정권이 오면 ‘좀 괜찮아지겠지’라는 착각과 만족은 금물이다. 민주주의를 앞세운 지난 정권들이 노동자를 어떻게 탄압해왔는지 잊을 수 없다. 권력가들에 매달리지 않고 억압의 현장으로 향하는 우리가 돼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움직이는 만큼(의 만분의 일 정도) 움직인다. 투쟁은 아래로부터 건설되고 세상은 아래로부터 변화한다. 이 진부한 이야기를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나가는 숙어로만 남겨두진 않았는지 스스로 진지하게 점검해야 할 때다.
이수기업 하청노동자들은 모터쇼 피켓팅에 나서기 직전까지 스마트폰을 붙잡고 애타는 마음으로 선고 생중계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파면이 선고되자마자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뚜벅뚜벅 모터쇼로 향했다. 내쫓겨지고도 다시 뚜벅뚜벅 돌아가 피켓을 들었다. 그리고 또 내쫓겨지고 경찰에 잡혀갔다. 잡혀간 노동자는 석방되자마자 곧바로 거통고조선하청지회 고공농성장으로 향했다. 이런 걸음들이 세상을 바꾼다. 권력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할 일을 하는 것. 다가올 새로운 국면에 우리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