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친위쿠데타 시도만큼이나 충격적이다. 헌법재판소가 아직까지도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사안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보니 오히려 결정문이 법적 조건들을 충분히 살펴보지 못할까 걱정될 정도였다. 이제는 8 대 0 인용을 자신하던 이들조차 조심스럽게 5 대 3 기각을 전망한다. 기각·각하 등의 기대가 높아지며 극우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조용해진 데 반해 범진보진영의 언어는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헌재를 없애야 한다느니, 민중항쟁이 일어날 거라느니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극우세력들이 사용하던 표현들이었다.
이번 사안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시간’이다. 사실 헌법재판관들이 8 대 0으로 인용 결정을 내리든, 5 대 3으로 기각 결정을 내리든 그런 건 다소 부차적인 문제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결정을 내리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국가적 통일성을 확보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서둘러 결정을 내려 파면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만들었다면, 그리해 조기대선 국면이 펼쳐졌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복권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는 사태를 수습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다. 보수·진보 가리지 않고 헌재의 권위를 아무렇지 않게 부정한다. 헌재마저 부정당하는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권위 있는 결정’을 내려 공동체를 통합하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제기했던 근대사회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카를 마르크스는 1843년 25살의 나이로 헤겔의 <법철학강요>를 비판하는 <헤겔법철학비판>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헤겔이 입헌군주정을 옹호하는 것을 비판하며 "다수의 단일자"라는 개념을 산출해 낸다. 법치국가에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궁극적으로 헌법에 근거를 둔다. 헤겔은 근대국가가 하나의 통일적 개체로서 개인·가족·시민사회 등을 포괄하며 그들의 의지·결정 등을 자기 자신에게로 소급 혹은 환원시킨다고 할 때 그 최후의 결정의 계기에 입헌군주가 있다고 주장한다. 헌재의 기능을 입헌군주가 수행한다고 봐도 좋다.
마르크스는 하나의 민족공동체의 개별적인 의지·행위 등이 입헌군주 ‘개인’의 의지로 소급된다는 헤겔의 주장을 비웃으며, 만일 그런 식이라면 하나의 개체로서의 ‘인류’ 또한 단 한 명의 인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국가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단일자’로 기능할 필요는 있지만, 그 단일자가 꼭 군주 한 사람으로 구성돼 있을 필요는 없다. 마르크스는 군주정을 부정하며 ‘다수의 단일자’, 다수가 동시에 하나의 개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국가적 통일성을 담보하는 (입헌)군주가 사라진 공화정 체제에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국가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의미만을 갖지 않게 됐다. 군주권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시도들을 ‘다수’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아 반복해서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게 됐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국가적 결정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수의 단일자’를 형성해 권위 있는 결정을 산출하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된다.
군주권의 빈자리를 채워 넣지 못한다면 헤겔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의회(및 시민사회)와 행정부 간의 내전이 발발할 수도 있다. 아니, 이미 벌어지고 있다.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 유럽 등의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혼란은 헌재가 결정을 미루는 바람에 근대 일반의 모순이 보다 선명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다수의 단일자’가 나타나기 어려운 이유로 공동체가 계급으로 분열되었다는 점을 꼽았다. 국가는 이러한 분열을 활용해 사회의 ‘종복’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탈바꿈해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됐다. 헤겔이 긍정했던 군주정은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성립된 ‘개인적’인 지배체계였다. 이 정치적 혼란을 해결할 방법이 계급해방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지금 상황에서는 상당히 암울하게 들린다. 우리는 ‘다수의 단일자’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이 정치적 혼란을 끝낼 수 있을까. 헌재가 서둘러 결정을 내리기를 바란다.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fpdlakstp@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