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철 한국노총 부천노동상담소 상담실장

“젊을 때나 회사에서 뭐라도 이뤄봐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지. 조합원들이 회사에 다른 기대나 미련이 별로 없어요. 어차피 정년도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임금이나 이빠이(많이) 올려서 벌 때 바짝 벌고 가야지.”

임금·단체교섭을 앞둔 지역 노동조합의 간부는 임금인상을 최대화하는 것이 올해 최대목표라고 했다. 지난 몇 년간 어려운 경제 상황을 고려해 임금인상을 자제해 왔단다. 물가 상승으로 올해는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조합원의 임금 인상 기대가 높아 부담스럽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고금리의 여파와 낮은 성장률 속에서 소비 여력이 감소해 그의 회사의 수익은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올해 역시 회사가 임금인상의 여력이 별로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임금인상 여력이 없다면 다른 부분에서 회사가 조합원들에게 장기적인 투자를 확대하는 방향의 약속을 얻어 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가령 정년 연장이 기대되고 산업전환으로 담당업무의 지속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계속고용과 산업전환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정년을 앞둔 조합원에 대해 회사가 기술 교육에 필요한 프로그램이나 비용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당 노조 간부는 현장 조합원들의 회사에 대한 분위기를 전하며 나의 제안에 코웃음을 쳤다. 파업 등을 통해 노조가 회사를 압박해 봐야 돈 나올 구멍이 없는데 어떻게 임금인상 기대치를 확보하려 하느냐는 물음에는 최선을 다했다는 모습은 보여줘야 한다고 속내를 설명했다.

노동조합이 기업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인상에 골몰한다며 신뢰하지 않는 것은 사용자들의 노조에 대한 오랜 편견이었다. 여기에 친노조 성향의 일부 노동·사회학자들 역시 노조의 임금인상을 지상 과제로 하는 활동 전략을 비판한다.

이때마다 거론되는 대표 사례가 한국 노동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교섭력을 지녔다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다. 노동시장이 이중화된 상황 속에서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는 비판이 주된 내용인데 심지어 일부 경제언론에서는 현대자동차지부가 내건 정년 연장조차도 성과급을 높여 받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위 사례의 노조 분위기를 전해 듣고 현대자동차지부를 비롯해 임금인상에 집중하는 노조들의 교섭전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해 기대수명이 늘어난 반면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에서 나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장시간 노동을 통한 경제적 수익뿐일 것이다. 은퇴 이후 나의 삶에 대해 국가가 책임져 주지 못할 것이란 우려는 이미 은퇴를 앞둔 노동자들에게는 일상적 공포로 자리를 잡았다.

매슬로가 제시한 욕구 이론은 인간 행위의 동기를 잘 설명한다. 매슬로는 인간에게는 단계별로 욕구가 있는데 저차원적인 생존·안전 욕구에서 고차원적 자아실현 욕구로 진화한다고 봤다. 해당 이론에 따르면 고임금의 노동자들은 생존과 안전의 욕구를 만족했으니, 자아실현의 욕구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저임금 노동자는 은퇴와 함께 노동으로 책임지던 생계를 위협받게 된다. 국민연금 개혁안이라는 이름으로 소득대체율과 지급 시기를 계속해 불리하게 바꿔 가는 정부에 은퇴 이후 돌봄을 기대하기는 난망하다.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생존과 안전의 욕구가 남아 있는 것이다.

고임금으로 생존과 안전의 욕구를 만족한 이들도 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에 집중하지 못한다. 기업은 청춘을 바쳐 일한 자신들을 고비용 저효율의 낡은 기계 취급하며 정년 연장 요구에 ‘노욕’이라 모욕한다. 좌절된 상위 욕구(자아실현)로 인해 오히려 하위의 욕구인 임금인상에 더 집착하게 된 이유다.

한국노총 부천노동상담소 상담실장 (leesey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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