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풍 공인노무사(노동법률사무소 활)

반도체특별법이 뜨겁다. 근로기준법의 특별법을 제정해 연구개발(R&D) 노동자의 근로시간을 늘리자는 주장이다. 근로시간 제한 때문에 반도체산업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것인데 장시간노동의 비효율성을 고려하면 노동자에게 경영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근로기준법을 무력화하는 시도들은 또 있다. 정부여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노동약자 지원법이다. 노동계에서는 이미 오랜 동안 5명 미만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요구하며 근로기준법 ‘확대’를 요구하고 있는데, 도리어 근로자개념과 노동약자개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막을 쳐서 분열을 기도한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법이 있다면 잘 가꾸고 적용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일 텐데 현실에서 근로기준법의 역사는 곧 수난의 역사였다.

1953년 제정된 최초의 근로기준법은 이미 완성된 법률이었다.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라는 헌법의 요청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의 정수는 최초의 근로기준법에 모두 담겨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규정은 해고제한, 근로시간 한도, 정신노동의 개념, 휴일과 휴가에 관한 규정들이다. 해고가 금지된 덕분에 노동자들은 보장된 ‘내일’을 계획하고 꿈꿀 수 있게 됐고, 1일 근로시간이 8시간으로 제한됨에 따라 금쪽같은 아이들의 고사리 손을 만져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주휴일과 연차휴가가 부여된 덕분에 고된 노동에 지치고 무거워진 몸을 안식처에 뉘일 수 있게 됐다. 제조업 노동자를 상정한 근대적 기획이라는 비판이 무색하게 노동의 개념에 일찍부터 ‘정신노동’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최초의 근로기준법이 1953년 한국전쟁 중 피난수도 부산에서 제정됐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조선방직노조를 탄압하던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노동운동가 출신 의원들에게 노동입법은 그만큼 절박한 문제였다. 외국의 법을 단순히 모방해 도입했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근로기준법의 제정과정은 치열했다. 특히 심의과정에서 의원들은 시간외 근로와 가산임금제에 관한 규정에 관한 원안과 3개의 수정안을 두고 토론장에서 각축을 벌였다. 기업인 출신 의원들은 ‘경제현실론’을, 노동운동가 출신 의원들은 ‘근로기준의 규범론’을 내세웠다. 치열한 토론 끝에 현재 근로기준법의 기본적인 틀이 가까스로 완성된 것이다.

이후 근로기준법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우선 근로기준법은 전태일 열사 이전에 사문화된 법률이었다. 평화시장에서 있었던 저 ‘근로기준법 화형식’ 이후에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법률로서 기능을 하게 됐다. 최초의 근로기준법은 5명 미만 제한 규정이 없었으나, 1989년 개정으로 5명 미만 사업장이 적용범위에서 제외됐다. 근로기준법의 해고 제한 규정은 1998년 파견법과 정리해고제, 2016년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근로자법)으로 상당부분 무력화됐다. 근로시간 제한과 가산임금규정은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도입으로 위기를 맞았다. 모두 최초의 근로기준법에는 없던 법과 규정들이다. 최근에는 경영계를 중심으로 주휴일 폐지주장도 나오고 있다. 아마도 법제정자들은 당신들이 다퉜던 문제를 놓고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다투게 될 것이라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최저기준이다.(근로기준법 3조) 그러나 이 조항이 무색하게도 예외를 만들어 원칙을 훼손하는 시도들은 계속되고 있다. 근로기준법은 제정 이래 안타깝게도 악화일변도의 역사를 걷고 있다. 혹자는 후불제 민주주의의 특성에서, 혹자는 상호 연결된 자유무역시장경제에서 근로기준법 수난의 불가피성을 찾는다. 그러나 이미 노동자대투쟁과 민주열사들의 희생을 지켜본 이들에게는 한없이 야속한 말이다. “올라가는 것보다 지키는 게 어렵다.” 어떤 스포츠선수의 말이 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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