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2017년 여름 우리 가족은 렌트 비용이 싼 자동차 왕국 독일에서 차를 빌려 체코와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를 돌아 다시 체코와 독일로 돌아오는 4주의 긴 여행을 했다.

차를 빌리면 숙박비가 비싼 관광지나 도심까지 안 들어가고도 근교에 값싼 숙소를 잡고 값싸고 맛있는 로컬 식당을 즐긴다. 이렇게 아낀 돈은 렌트 비용을 충당하고도 남는다. 차 타고 더 많은 도시를 돌아다니는 건 덤이다. 보통 체코에 가면 프라하만 보는데, 우리는 체스키 크룸로프, 쿠트나호라, 파블로프 같은 조용한 보석 같은 소도시도 둘러봤다.

유럽에선 차로 국경을 넘어도 검문소는커녕 누구 하나 여권 보자는 사람도 없었다. 딱 한 군데 헝가리 검문소만 예외였다.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 헝가리 남서부 발라톤 호숫가 한적한 숙소로 차를 몰았는데, 헝가리 국경 검문소에서 총 든 군인이 우리를 막고 차량까지 수색했다. 여권까지 보여주자 더는 트집 잡지 않고 보내줬다. 5분 남짓이었지만 헝가리는 우리 가족에게 나쁜 나라가 됐다. 그때는 헝가리 군인이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최근 유럽 극우정당사를 읽으면서 이해가 됐다.

히틀러의 나치당처럼 헝가리를 16년째 독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빅토르 오르반 총리도 2010년 공정한 선거로 당선된 합법 정권으로 출발했다. 63년생 오르반 총리는 민주화 물결이 거셌던 1989년엔 자유선거와 소련군 철수를 외치는 열혈 학생운동 지도자였다. 그는 진보적 헝가리계 미국인 조지 소로스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

35살 청년 오르반은 1998년 첫 총리 땐 중도우파였다. 오르반이 이끄는 피데스(Fidesz,청년민주동맹)당은 경쟁했던 사회당이 스캔들로 무너지자 2010년 재집권했다. 53%를 득표했지만 의석은 3분의 2를 차지했다. 개헌선을 확보한 오르반은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오르반의 첫 독재 행보는 ‘사법부 장악’이었다. 헌법을 바꿔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11명에서 15명으로 늘리고 자기 측근 4명을 심었다. 대법원장이 되려면 헝가리에서 판사 경력 5년 이상인 조건을 새 법에 넣어 안드라스 바카 대법원장도 내몰았다. 바카는 유럽 인권재판소에서 17년 일한 권위 있는 판사였지만 헝가리 판사 경력이 5년에 조금 모자랐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판사 정년을 70세에서 62세로 낮췄다. 새 법에 따라 274명의 판사가 물러났다. 그는 집권 3년 만에 사법부를 완전 장악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언론이었다. 이 역시 ‘합법’을 가장했다. 그는 구조조정 명목으로 헝가리 공영방송의 천 명 넘는 언론노동자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자기 측근을 앉혔다. 민영 언론 장악도 합법을 가장했다. 그는 측근에게 민영 언론사를 사들이거나 독립 언론사의 모기업 경영권을 차지하도록 도움을 줬다.

그는 측근을 언론위원회에 앉혀 ‘편파’ 보도를 금했다. 가짜뉴스를 처단하겠다면서 입만 열면 가짜뉴스를 줄줄 외는 누구랑 닮았다. 위원회는 2020년 50만 청취자를 가진 진보 라디오 방송사 클루브라디오의 허가 갱신을 거부했다. 양식을 정확히 기입하지 않았거나 50분 방송한 프로를 45분으로 보고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2017년 헝가리 언론의 90%를 장악했다.

끝으로 그는 선거 운동장을 기울였다. 먼저 선관위를 장악했다. 선거구를 피데스에 유리하게 바꿨다. 2014년 선거에서 피데스는 2010년보다 60만 표를 잃었다. 득표율은 53%에서 45%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피데스는 2010년과 같은 3분의 2 의석을 차지했다. 2018년에도 이 수법을 사용했다.

빅토르 오르반은 합법을 가장해 민주주의를 허무는 놀라운 재주를 부렸다. 윤석열은 ‘헝가리의 트럼프’라는 오르반이 뭐하는 사람인 줄도 모르지만, 그와 너무도 닮았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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