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못내 서운하던 차였다. 주변의 좌파 지인들이 하나둘 미국 CIA에 신고당했다는 얘기를 접하며 아무도 신고하지 않을 정도로 활동이 미비했던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드디어 CIA에 신고했다는 이가 나타났을 때 안도감마저 들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CIA에 신고 한번 당하지 않고서는 좌파를 자처할 수도 없는 세상이 돼 버렸다.

극우들이 왜 이렇게 CIA에 신고를 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면 이들의 망상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좌파들은 반미를 외치면서도 자식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위선자이자 기득권자들이기 때문에 CIA에 신고해 미국 출입국을 어렵게 만들면 무서워한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좋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이 망상도 문제적이지만, 자신들이 아닌 미국이 대신 한국 좌파들을 처리해 줄거라는 이 기괴한 ‘사대주의적’ 믿음에서 드러나는 몰 주체성에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들이 미국에 이렇게 매달리는 이유는 반중·혐중 세계관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반도, 그중에서도 한국을 미중 대립이라는 세계사적 갈등의 최전선이라 생각한다. 미중 대립이라는 세계사적 대립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대립이라는 일국사적 대립에 직접적으로 반영돼 나타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과거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미국이 참전해 한국을 지켜 줬던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 북조선으로부터 한국을 지켜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망상의 귀결이 채용비리를 통해 선관위에 잠입한 중국 간첩 99명을 12·3 내란사태 당시 주한미군이 체포해 주일미군기지로 압송했다는 주장이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윤석열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요구가 들어 있을 거라며 밤새 기다리는 극우들의 정성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이런 얄팍한 세계관은 몇 가지 사실만 적시해도 바로 논파돼 버린다. 국민의힘은 중국공산당과 자매결연을 맺은 정당이며, 김재원은 이를 이유로 정용진 신세계 회장의 ‘멸콩’ 논란 때 ‘멸콩’의 공산당이 중국공산당이 아니라 조선노동당을 지칭하는 거라 말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을 우당(友黨)이라 표현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술 더 떠서 중국의 전승기념절에 참석하기까지 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미국 의전 서열 3위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패싱해 “윤석열 정부는 친중인가요?”라는 반감 섞인 물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 친위쿠데타 이전까지만 해도 윤석열은 대중관계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해 왔다.

그럼에도 극우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반중전선의 전위대라 굳게 믿는다. 어차피 이들에게 팩트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조선족, 화교 등의 소수자들이 곳곳에 암약하며 한국 사회를 좀먹고 있다고 온갖 망상들을 풀어놓는다. 1931년에 있었던 만보산 사건과 그 이후의 폭동 사건이 재현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마저 들 정도로 반중정서를 심화시키고 있다. 그 근간에 ‘힘’의 논리가 있다는 걸 지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미국이라는 ‘형님’이 우리를 지켜 줄 거라는 사대주의, 국내의 조선족을 비롯한 ‘약자’에게 막 해도 된다는 오만함, 자신들이 세계사적 대립의 전위대로 나서고 있다는 자아도취, 막상 정권 잡으면 힘 있는 중국에게 한마디도 못하는 비굴함, 약자를 탄압하는 걸로 돈 벌겠다는 탐욕 등은 모두 힘의 논리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문제는 극우들이 아니라 중국이다. 중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극우들의 주장에 반박한다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처럼 그저 중국에 경제적 이익만 보고 “셰셰”라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는 없다. 경제적 실익만 내세우며 중국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극우들의 반중정서에 동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좌파는 어떤 지역질서를 상상하는가. 심화되는 반중정서를 마냥 부정하기보다는 그를 매개로 새로운 지역 질서와 국내 질서를 그리려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좌파가 주저하는 사이 극우들의 힘의 논리가 치고 들어온다. 지금이라도 반중정서를 반권위주의 정서와 연결시키며 노동과 공화주의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지역 질서와 국내 질서를 그려야 한다. 다소 도발적이지만 좌파에게도 반중정서가 필요하지는 않은지 고민해 볼 시점이다.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fpdlaks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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