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뭔 대화
경쟁은 대단한 결과를 만든다. 독재자만 가졌던 권력을 누구나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민주화다. 대통령을 당선시키면 곁에서 권력을 나눌 기회가 생긴다. 권력 경쟁은 심해졌고, 민주주의는 경쟁의 도구처럼 변했다. 권력 게임은 민주주의를 벗어나 급기야 상대를 총으로 쓸어버리려는 계엄에 이르렀다. 이런 판에 지인들과 ‘사회적 대화’에 대해 얘기할 계기가 생겼다. 이 시국에 사회적 대화가 뭐 그리 중요할까. 하지만 사회적 대화가 충만하면 정치가 이토록 적대적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돌이켜 봤다.
1990년대 말 ‘노사정위원회’가 등장한 후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은 사회적 대화를 위한 기구의 이름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변했다. 민주노총의 노사정 참여를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에 노사정 합의야말로 사회를 발전시킬 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사회적 대화를 복지국가를 여는 통로로 여겼다. 이들에게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다.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달랐다. 노동과 자본은 대립하는데, 사회적 대화는 계급의식을 흐릿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의 생각에 사회적 대화는 노동계급을 엉뚱한 길로 빠뜨리는 덫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 대화에 관한 안건을 다룬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폭력으로 엎어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혁명주의자인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사회적 대화가 한국에서 가능할까
사회적 대화를 주장하면 개량주의자, 거부하면 혁명주의자로 보는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전형적 흑백논리라는 비판도 당연히 뒤따랐다. 대화를 주장하면서도 변혁을 추구하고, 대화를 거부하지만 개량주의자인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논의를 과거 얘기로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최초 논쟁으로부터 20년이 지난 문재인 행정부 때 다시 이 쟁점이 불거졌다. 민주노총에 논쟁이 벌어졌고, 사회적 대화 불참을 확인한 2019년 대의원대회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오자 민주노총에서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사회적 대화에 대해 어떤 입장이세요?” 신생노조 간부가 물어서 당혹했다. 민주노총에서 한참 논란이던 2018년과 2019년이 지났는데도 받은 질문이라 그랬다. 이 신생노조의 젊은 간부들 사이에 꽤 논란이었나 보다. 젊은 그들은 실용적으로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빗나갔다. 사회적 대화를 반대하는 정파 활동가들은 과거 노사정 합의로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정리해고제로 고용이 불안해진 나쁜 결과만 생겼다고 주장했고, 신생노조 간부들도 사회적 대화에 대한 피해의식과 거부감을 전달받은 것 같았다. 민주노총의 20년 전 사회적 논쟁에 비해 무엇이 발전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신생노조들이 사회적 대화를 너무 실용적으로 얘기했어도 실망했을 것이다. 사업장 교섭과 사회적 교섭은 차원이 다르다. 사업장 교섭은 자기 조합원에 국한된 교섭이다. 사회적 교섭은 그것을 넘어선 노동 관련 합의를 통해 사회적 규범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논란이 간부들끼리 갈등을 일으킬 수 있어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조가 자기 조합원을 넘어서 모든 노동자를 생각하며, 더 나아가 모든 시민을 위한 사회적 책임으로 임해야 하는 일이다.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질문했던 젊은 간부들에게 왜 정치적·경제적·산업적 대화가 아니고 ‘사회적’ 대화인가를 되묻기도 했다. 왜 굳이 정부와 재계와 노동계와 공익위원까지 포함한 사회적 대화를 주장하는 것일까. 그래서 공익위원이나 재계가 다 모일 필요가 없다면서 민주노총과 정부의 ‘노정교섭’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사회적’ 대화를 원하지 않으며 ‘사회적’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의 관심은 무엇일까. 민주노총에서 사회적 교섭 못지않게 논란을 격하게 자주 불러온 것이 정치세력화다. 사회적 대화가 아니라 ‘노정교섭’을 원하는 것도 민주노총이 권력과 맞짱 뜨려는 것이고, 민주노총 정파들이 정치방침이나 선거방침을 가지고 난리인 것도 국가권력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적 집착이 이상하게 흘러 조합원 100만명이 넘는 민주노총이 국회의원 겨우 몇인 진보정당을 쫓아다니는 어이없는 일도 생긴다.
집착이 보인다. 하나는 권력을 장악해 세상을 바꾼다는 20세기 혁명론의 잔재가 남아서 국가에 집착하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산별노조와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양 날개 전략이 키운 정치세력화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거나 진보정당을 통해 권력의지를 실현하겠다는 꿈, 그렇게 오매불망 날아오르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몸보다 날개다.
노조는 시민의 결사체다. 그래서 노조는 사회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자신의 몸뚱이인 ‘사회’ 그 자체를 확대·강화하는 방법을 창조하는 데 성공적인 것 같지 않다. 정파 활동가들은 권력의지는 강렬해 개인적 욕망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이라는 조직 차원에서도 늘 정치방침과 선거방침을 들이대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활동가들에게 ‘사회’라는 개념을 물으면 거의 백지다. 사회적 대화라고 할 때, 그것이 중요한 이유에 대한 설명은 물론 사회적인 것이 뭔지 개념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역시 어긋났던 정파 과두제
사람들이 늘 개념을 따지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고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개념의 부재나 사회에 대한 전략의 부재로 한국의 사회적 대화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노조만이 아니라 정부와 재계의 태도까지 포함해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노조의 성숙이기 때문에 노조를 중심으로 얘기한다.
민주노총에서 사회적 대화 참여 문제가 한참 논란이던 2018~19년 동안, 한 지역에서 긴급 현장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현장 80%가 사회적 대화 참여를 지지했다. 코로나19가 시작된 때에 사회적 대화에 대해서도 80%의 찬성의견이 나왔다. 이 설문 결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를 것을 우려했기에 결과를 공개적으로 인용하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공식 발표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 탄핵 촛불 이후에 탄생한 문재인 정부 시절의 설문이었고, 한 지역이 민주노총 현장을 대표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지역이 민주노총 일반적인 현장과 특별히 다른 특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 상층에서는 사회적 대화를 거부했다.
과두제(寡頭制)는 집단이 오래되면 적은(寡) 일부가 머리(頭)를 차지하는 현상이다. 현장과 다른 판단을 내리는 상층을 보면서 떠올린 것은 과두제였다. 현장은 사회적 대화에 유연한데 상층은 다른 결론을 내린다. 어떤 이는 정파의 실력이나 현장 장악력이 예전만 못하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일반 조합원의 판단과 상층 정파의 판단이 다른 것과, 대의제를 통한 결정이 정파에 좌우되는 현실이다.
국회 차원 사회적 대화를 추진하는 것, 사회적 대화 기구를 대통령직속이 아닌 독립기구로 만들자는 주장도 있다. 정파 개입을 줄이기 위해 현장과 지역에서 상향식으로 올라가는 전략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대한 개념, 사회의 일원으로서 노조의 사회적 역할, 사회적 실천으로서 지역과 전국 차원의 다양한 사회적 기구에 대한 전략이 탄탄하지 않으면 쉽지 않은 것이 사회적 대화다. 그런 기초가 부족해도 시도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렇게 실패한 사회적 대화에 자율적 선택권 없이 ‘동원된 자들의 고통’을 봤다. 그런 논의와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성찰을 통해 기본 개념부터 다질 수 있으면 좋겠다.
아유 대표 (jogju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