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건설 현장에서 미장일하던 아빠가 높은 곳 작업대에서 떨어졌다. 발목뼈가 이리저리 부러졌다는데, 바스러졌다고 하니 알아듣기 쉬웠다. 급히 병원엘 찾아가 누운 아빠 곁에 머물렀는데, 멀쩡한 척하는 아빠 얼굴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뜨거운 것이 왈칵 올라와 난감했던 기억이다. 천안이니 나 사는 서울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서 아빠는 늙어 간다. 가야지 가야지 하던걸, 한두 번 미루다 보니, 계절이 바뀌고 말았다. 설 연휴에 눈이 쏟아져 내려 아빠 사는 그 시골집 검은색 기와 모양 지붕이 하얗게 덮였다. 아직 새카만 머리칼 아래, 주름 부쩍 깊은 아빠가 날 반겼다. 막내 얼굴 보기가 참 힘들다고, 아빠와 같이 늙어 가는 엄마가 삐죽거렸다. 이토록 오랜만인 게 다 권력자의 계엄령 탓이라고 둘러대니 맞장구가 빨랐다. 무장한 군인의 총구 앞에서 번뜩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고 나는 말했다. 가마솥에 푹 끓였다는 사골곰탕에 밥, 김치와 김 따위 차린 저녁 밥상이 그저 평화로웠다. 설을 며칠 앞둔 날, 저기 아빠 영정에 국화 올리면서 딸이 운다. 영정 속 아빠는 공사현장 2미터 높이 이동식 비계에 올라 미장 작업을 하다 추락해 사망했다. 안전모는 지급되지 않았다. 안전난간도 없었다.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시행을 5일 앞둔 날이었다. 떨어지고, 끼이고, 폭발에 휩싸여 죽는 노동자가 끊이질 않아, 죽음의 공포가 실은 일상의 일터에 넘친다. 더는 늙지 않는 모습으로 남은 아빠 사진 앞에 겨우 선 딸이 왈칵 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