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의 총구 앞에서 민주주의는 동사로 온다
여의도는 그렇게 역사의 현장이 되고 있었다. 숨이 멎을 듯한 잠깐의 멈춤, 그리고 발표된 “가 204표.” 뒷말은 환호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순간, 공기의 질이 풍선처럼 가벼워졌고 옆사람을 믿어도 될 만큼 따뜻해지고 있었다. 2024년 12월14일, 여의도는 다시 민주주의를 숨쉬기 시작했다. 지옥문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되돌아온 느낌.
우리의 민주주의는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오랜 세월을 굵어 온 뿌리가 있었다. ‘부끄러운 60~70대’와 장강의 앞강물을 밀어내는 20~30대가 함께 여의도에 모였다. 운동은 그렇게 세대를 교체하고 있었다. 촛불은 응원봉으로, 민중가요는 아이돌의 K팝으로 바뀌었다. 단두대라 쓴 무시무시한 깃발도 있었지만 ‘전국 집에 누워 있기 연합’이라는 게으른 깃발도 같이 나부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약점을 시민의 집회민주주의(assembly democracy)가 치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블리(K. M. Blee)는 민주주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과정’(in the making)이라는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과정과 결과라는 역동적이고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충격적 실패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것은 어김없이 동사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움직이는 민주주의,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민주주의는 선반에 얹어둔 생선 토막 같은 것이 아니라 펄펄 살아 움직이며 자신을 키워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다.
윤석열을 잡아넣고 파면하는 일, 불의의 권력을 몰아내는 일은 여전히 남은 과제지만 다른 한편 우리는 지금 형성의 시기를 만나고 있다. 권력구조의 변화를 넘어 민주공화국의 판을 새로 짜는 일, 이른바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 그것이다. 민주국가가 모두에 의한 국가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국가다(김상봉, 2024). 그것이 어떤 역학구도 속에서 어떻게 다가올지를 예측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변화의 청사진은 어느 힘 있는 일군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공론장의 산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백화가 제방하고 백가가 쟁명하는 공론장.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국회 앞 여의도는 시민들이 참여해 공동체의 주요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대의제 정치과정에 투입하는 정치적 공론장(public sphere)이었다. 공론장에서 집약된 의견은 공적 의견으로 정당과 의회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으로 전환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세모글루와 존슨은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목소리의 다양성이 핵심이며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꼭 포함돼야 한다”며 하버마스가 제시한 공론장 개념이야말로 “건전한 민주적 담론의 핵심 특징을 포착하고 있다”고 말한다(『권력과 진보』).
이중전환과 저성장 체제의 도래라는 도전
노동의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노동은 당면한 과제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과제들을 맞닥뜨리고 있다. 미완의 과제에는 노동시장의 불평등과 사회안전망의 미비, 기업별 체제에 갇힌 노사관계와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이 포함된다. 여기에 더해 노동은 디지털 전환과 생태전환이라는 이중전환을 맞고 있다. 플랫폼노동자와 프리랜서, 새벽 배달노동자, 하청노동자와 같은 불안정노동계층이 노동시장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기후위기가 에너지 전환‧산업전환을 강제하지만 지체된 전환은 전환의 실패, 나아가 전환적 실업(transitional unemployment)의 공포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중전환은 일자리의 부족으로 인한 구조적 실업과 수급의 불일치로 인한 마찰적 실업을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이중전환의 충격이 ‘다른 나라보다 한발 앞선’ 저성장 체제의 도래와 맞물릴 때 그 파급효과는 고삐 풀린 말처럼 노동시장을 휘저을 것이다. 잠재성장률이 제로로 수렴하는 가운데 이중전환은 실업과 노동시장의 서비스화 및 유동화, 그리고 불안정 노동자의 주류화를 강제할 것이다.
하지만 미래 노동시장의 모습은 주체들의 전략적 대응의 산물이다. 그것은 현재의 연장이 아닌 질적인 전환을 내포한다. “현재의 추세와 데이터에서 미래를 해독한다는 것은 커피 찌꺼기에서 무엇인가를 읽어 내려는 일만큼이나 문제가 있다”(울리히 벡, 1999). 역사 해석에서 결정론의 오류는 벌어진 일은 벌어졌어야만 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의 대응은 생략된다.
2024년, 아세모글루와 존슨이 노벨 경제학상을 탄 핵심적인 공적은 기술진보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배 엘리트의 일방적인 의사결정을 견제하는 길항권력, 나아가 대안권력의 존재를 밝혔다는 점이다. 기술진보로 인해 고통을 받고 비용을 떠맡게 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기술진보를 노동친화적이고 포용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핵심은 기술 발달로 인한 비용 절감과 생산성 증대의 이득을 노동자들과 나누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노동을 둘러싼 세계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도전에 맞서 일의 세계(world of work)도 질적 전환이 불가피하다면 중요한 것은 노동을 위한 공론장, 노동에 의한 공론장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참가하고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거버넌스. 이른바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바로 이 거버넌스의 산물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024년 사회적 대화 보고서를 내면서 “효과적이고 포용적인 디지털‧녹색전환을 위한 정상수준의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동정치의 계절에서 필요한 ‘더 많은 민주주의’의 공간
촛불혁명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노동존중사회’의 구축에 실패한 이면에는 사회적 대화의 실패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넘어 사회적 대화라는 거버넌스의 실패, 다시 말해 노사정이라는 거버넌스 주체들의 실패일 수 있다.
우리가 실패한 지점을 우회할 수 없다면 노동존중사회 2.0의 구축 역시 사회적 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양 수많은 노동개혁 담론을 쏟아내고 그 절박성을 강조했지만 결정적인 한계는 그것을 실현할 민주적인 과정을 설계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안의 하나로서 자림매김한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해결하려는 시도하고 할 수 있다. 시민단체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했고 노동조합은 이를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 이해했다. 하나같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직시하고 사회적 시민권을 확보하기 위한 민주주의를 말한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화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공고화한다. 또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사회운동의 정치세력화’라는 매개를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로 환원한다.
윤석열은 민주주의가 가장 필요할 때 민주주의를 훼손했지만 시민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회복력(resilience)을 갖췄다는 걸 온몸으로 입증했다. 이제부터는 비판과 저항의 시대에서 참여와 형성의 시기라고 한다면 그 거버넌스의 구축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정치적 공론장으로서 ‘민주주의를 만드는 과정’이자 노동을 위한 정치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한다.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tjpark07@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