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 위해 묻는다. 18일, 지난해 노동절인 5월1일로부터 597일이 지났다. 지난해 5월22일로부터는 576일이 흘렀다. 각각 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건설지부 3지대장의 분신, 그리고 노조가 고인의 분신을 방조했다며 그 죽음을 희롱한 자들을 밝혀 달라는 유족과 노조의 고소·고발로부터다. 사회가 잊기엔 충분했을까. 양 3지대장의 부인 김선희(47·사진))씨는 기억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지난 17일 양 3지대장 친형의 목소리를 들은 <매일노동뉴스>가 같은 날 늦은 밤 김씨와 나눈 이야기도 전한다.
- 고인의 분신 당시 모습이 찍힌 춘천지검 강릉지청의 CCTV 유출 관련 1인 시위를 지속하고 계신다.
“춘천에서는 한 달에 세 차례 정도 하고 있고, 서울경찰청 앞에서 한 달에 한 번가량 하고 있다. 남편이 촛불단체 회원이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촛불단체가 같이 해 주고 있고, 노조에서도 같이 참여해 주고 있다. 진척이 별로 없다. 1인 시위를 한다고 해서 윤석열을 당장 끌어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건 아니지만 막막하고 답답하다. 길게 갈 싸움인 것을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막막하다.”
- 대통령이 탄핵됐다. 기대감이 생기진 않았는지.
“오래 갈 것 같다. 쉽지 않을 것 같다. 탄핵을 가결했다고 하지만 이제 겨우 첫발이라고 생각한다. 한 발자국 앞으로 갔다고 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 인용이 남아 있다. 윤석열이 탄핵된다고 한들 수사가 제대로 이뤄질지 모르겠다. 지난해 CCTV 유출 관련 고소·고발 당시 공무원을 30명 조사한다고 했다. 근데 그 공무원들이 경찰인지 검찰인지도 알려 주지 않는다. 사람이 그렇더라. 내 잘못을 꽁꽁 숨기고,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기적이다.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노조가 분신 방조, 유서대필”
고인 능욕한 원희룡·조선일보
김씨와 노조는 지난해 5월22일, 양 3지대장의 죽음을 노조간부가 방조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조선일보와 해당 기자, 보도에 쓰인 CCTV 영상 유출자를 고소·고발했다. 노동절인 그해 5월1일 정권의 건설현장 불법행위 근절을 명분으로 한 고강도 수사에 걸려든 양 3지대장은 온몸에 불을 댕기고 윤석열 정권 퇴진을 촉구했다.
열사로 남았지만, 일부 언론과 정치권은 주홍글씨를 휘갈겼다. 양 3지대장의 유서가 대필됐고, 그가 분신하던 당시 불을 끄지 않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그의 죽음을 방조한 노조간부가 있다고 했다. 이런 보도에 공공기관의 CCTV가 유출돼 쓰였다. 원희룡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은 조선일보 보도를 소셜미디어에 인용하면서 “동료의 죽음을 투쟁의 동력으로 이용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라고 써 또다시 가족의 가슴을 후볐다.
견디지 못할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고인을 희롱한 데 유족과 노조가 분노했다. 그러나 고소·고발 이후 피신고자 조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진척이 없다. 남편의 명예를 회복하고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버지였노라고 말하기 위한 김씨의 투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생계와 육아, 그리고 투쟁을 병행하는 삶.
“조금만 버텨서 같이 탄핵 봤더라면…”
“양회동이라는 사람 잊지 말아 주세요”
대통령 탄핵은 그런 그에게 596일치 그리움을 한꺼번에 몰고왔을까. 처음 김씨는 탄핵 이후 심경을 묻는 질문에 “복잡하고 남편 생각이 더 많이 났다”고 말했다. 질문을 이어 가면서 울음 섞인 응어리를 꺼냈다. 김씨는 “분신 당시보다 탄핵 가결이 더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윤 대통령은) 정말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 고작 이런 사람 때문에, 남편이 그랬다는 게…, 더 화가 났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어떻게 저렇게까지 파렴치한지. 온갖 막말을 가져다 붙여도 그 표현이 아까울 정도예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부결 시킨(7일 탄핵표결 불성립) 국민의힘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은 보지 않는구나, 우리 같은 사람은 안 보는구나 생각하면서 실망감이 컸어요. 뭐라고 말도 안 나왔어요. 지난해 그날(분신한 날)도 많이 힘들었는데 가결된 날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남편 마음은 다 이해가 안 가요. 못하겠어요.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누구보다 아이들, 남편에게는 아이들이 항상 무조건 (1순위)이었거든요. 그래서 더 이해가 안 가요. 탄핵이 가결된 날, 조금만 버텨서 같이 이런 상황을 봤더라면. 그 상황(수사 당시의 상황)이 어려웠겠지만 같이 버텼더라면….”
어느 대목에선 원망했고, 어느 대목에선 그리워했다. 또다시 분노하다 납득했다. 600여일 간 하루 내내 그런 감정들이 휘몰아치지 않았을까. 윤석열 정권이 할퀸 시간을 오롯이 버텨낸 김씨는 단 한 마디를 당부했다. “양회동이라는 사람을 잊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