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 변호사(법률사무소 고른 대표)

“잠시 후 10시 마감 관계로 전산상 배송 완료 문자 발송 후 실제 마감을 하겠습니다. 00동은 10시40분 전후로, 00아파트는 11시20분 전으로 배송 완료될 예정입니다.”

한진택배 기사님 문자메시지다. 또 선(先) 전산마감 후(後) 배송이다. 강정마을에서 주문한 감귤이 도착한다는 소식인데 하나도 반갑지가 않다. 자정이 다 된 시각, ‘쿵’하고 문 밖에 상자가 놓이는 소리가 난다. 이 감귤은 몇시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될까, 아니 저 기사님은 몇시까지 노동한 것으로 ‘기록’될까.

잇단 과로사에 한진택배가 10시 이후 심야배송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2020년 10월의 일이다. 당일 처리 못한 물량은 다음 날 처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현장에서는 “다음날 나오는 물량과 겹치면 죽는다”며 실제로는 전산입력만 10시 전에 완료하고 그 이후 계속 배송을 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4년이 넘도록 택배사 전산에는 10시 이후 노동이 삭제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질을 가리는 엉터리 외관을 고착화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법원조차도 종종 ‘실질’을 찾아내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최근 대법원은 인천항 갑문 정기보수공사 중 발생한 중대재해에 대해 원청인 인천항만공사와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대법원 2024. 11. 14. 선고 2023도14674 판결). 항소심은 철강구조물공사업 등록 등 해당 공사의 시공자격이나 시공을 위한 인력을 갖추고 있는지 등 형식적 외관을 토대로 원청이 산업안전보건법상 ‘건설공사의 시공을 주도해 총괄·관리’하는 ‘도급인’이 아니라 ‘건설공사발주자’에 해당할 뿐이라고 판시했다. 원청이 사망사고에 대한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산업안전보건법 규정 체계나 입법 경위, 도급인의 안전보건조치의무 인정 범위 확대 및 수급인의 의무와 중첩적 부과 취지, 사망사고에 대한 도급인 책임 강화의 입법적 의미 등을 차례로 짚은 뒤, 도급인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자신의 사업장에서 시행하는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재해 예방과 관련된 유해·위험요소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해당 공사에 대해 행사한 실질적 영향력의 정도, 해당 공사에 대한 전문성, 시공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규범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항만 핵심시설인 갑문의 유지·관리는 원청인 인천항만공사의 설립 목적 중 하나로, 해당 공사의 전 과정을 기획하고 설계도면을 직접 작성했으며 공정률 점검하면서 설계도면을 변경하기도 한 점 △원청이 철강구조물공사업 등록을 하지 않았지만 국유재산인 갑문 관리를 대한민국으로부터 위탁받아 갑문시설물 유지보수를 주 업무로 하는 전담부서를 두고 관련 점검을 수행한 점 △원청은 자본금 5조 원의 거대 공기업인 반면 시공사는 자본금 10억 원, 상시근로자수 10명의 소규모 기업인 점 △원청의 위험성평가표에는 사고 이전부터 중량물 취급 관련 사고 위험이 지적된 점 △원청은 사고지점 인근에 안전난간을 설치했으나 사고가 발생한 작업장소에는 설치돼 있지 않았고, 작업자가 착용했던 안전대는 사고 당시 안전난간에 고정돼 있지 않았던 점 등에 비춰, 원청은 갑문 정기보수공사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산업재해의 예방과 관련된 유해·위험 요소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관리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갑문 정기보수공사에 관한 높은 전문성을 지닌 도급 사업주로서 수급인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법원은 관계수급인 근로자에 대한 안전보건조치의무를 부담하는 도급인 판단에 건설공사 시공자격 보유 여부 등을 고려했지만, 대법원은 유해·위험 요소에 대하여 실질적인 지배·관리 권한이 있는지, 도급인으로서 수급인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등 ‘실질’을 파악하라고 한 것이다.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실질을 보는 것은 수고롭다. 기록은 자주 실제와 다르게 남겨지고, 형식은 때때로 엉뚱한 현실의 근거가 된다. 거짓과 형식이 뒤섞인 일터에서 우리 법원이 실패 없이 실질을 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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