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떠 보니 창밖 세상이 하얗다. 눈이구나, 출근을 어쩌나, 길을 떠돌며 젖지 않으려면 뭘 챙기나 생각부터 든다. 제 방수 장갑이며, 핫팩과 눈오리 집게를 찾아내 놓으라는 딸아이 성화에, 왜 네 물건을 내게 와서 찾느냐고 또박또박 따져 물었는데, 그게 다 헛일이라는 걸 잘 안다. 폭설처럼 갑작스레 쏟아져 내린 그 녀석 사춘기 등쌀도 언젠가 눈 녹듯 사라지겠지 싶어 군말 없이 집안을 뒤진다. 비 들어 눈을 쓴다. 몇 알 단단하게 뭉쳐 뒀다가, 학교 가는 아이 등에 던지고 만다. 털 부츠 신고 뒤뚱거리는 꼬마 뒤로 어린이집 가방 등에 멘 아빠가 딱 붙어 살핀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만들어 둔 눈사람이 골목길 곳곳에서 웃는다. 눈이 펑펑 종일 쏟아졌다. 어느 멀끔한 빌딩 진입로가, 국회 너른 땅 구석구석이 그럼에도 말끔했다. 눈 오면 바쁜 사람들이 부지런을 떨었을 테다. 안부 전화하기 좋을 때다. 밥은 먹었냐, 몸은 건강하냐, 손주는 잘 지내냐 세 마디 말이 전부인 무뚝뚝한 늙은 아빠와도 할 말이 조금 더 생겨 부자의 대화에 부쩍 생기가 돌았다. 암 수술로 하시던 경비 일을 그만둔 아빠는 더 이상 눈을 치우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던가. 시골집 마당이며 비닐하우스에 높게 쌓인 무거운 습설을 치우느라 아빠는 여전히 바쁘다. 바빠 다행이라 여긴다. 날리던 눈발이 눈에 들었던지 순간 눈이 시렸다. 늦은 밤 택시가 잡히질 않아 한 시간을 걸어 도착한 집 앞에 쪼르륵 줄지어 선 눈오리를 보고 웃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