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주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 시절,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설치를 둘러싸고 진행된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구성 및 운영원칙을 살펴봤다. 계층위원제를 도입하고 사회적 대화를 노사가 중심이 돼 협의하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노·사와 정부가 합의한 이 원칙들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에 포함돼 국회를 통과했다. 상임위 만장일치의 원안통과였다. 이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 통과와 겹쳐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법률로 확대되면서 양대 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떠난 경위를 살펴봤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 계기이기도 했다. 노동존중사회 구축이라는 커다란 명제가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둘러싼 갈등으로 멈춰서는 건 수레바퀴가 사마귀 앞에서 멈춰서는 격이었다. 우회할 수는 없었을까. 앞으로 사회적 대화는 첩첩산중을 가듯 걸핏하면 멈춰 설 게 아닌가. 따라오는 질문은 사회적 대화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사회적 대화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글을 쓸 예정이다. 사회적 대화 자체의 성격과 함께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된 사회적 대화의 성격도 살펴볼 작정이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오해와 문재인 정부 시절 추진했던 사회적 대화의 성격 변화는 간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변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존중사회 구축’처럼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끝난 뒤 사회적 대화의 상(像)을 꾸리는 일을 말한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이해와 오해를 넘어

사회적 대화는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 정의와 기능을 비롯해 한국에서의 가능성과 조건을 둘러싸고 학계에서는 물론 노동계에서도 ‘사회적 합의’는 없었다. 실천적인 모색보다는 이데올로기나 정파적 시각을 기반으로 늘 ‘해야 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라는 양자택일의 논쟁만 도돌이표처럼 되풀이했다. 이론은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됐을 뿐이었다. 하나같이 과거의 경험을 철 지난 레퍼토리처럼 소환하거나 신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유럽의 사회적 대화에 기댔다. 시대는 흐르고 거기에 얹혀 사회적 대화도 같이 흐르는데 사회적 대화에 대한 인식은 과거의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 장(章)에서는 사회적 대화가 무엇인가에 이어 사회적 대화가 갖는 성격이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노동 거버넌스의 일환이자 노동정치라는 사실을 말할 것이다. 노동정치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한국 노사관계의 사각지대이자 노동운동의 약한 고리에 해당한다. 동시에 사회적 대화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표현이자 ‘갈등의 사회화’ 과정이라는 사실을 살펴볼 작정이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정부의 일방주의를 넘어 노사가 권력을 공유하는 과정이자 기업별 체제가 갖는 정책 소외를 뛰어넘는 과정을 말한다. 또한 갈등의 사회화를 통해 사회적 대화는 사회적 투쟁의 불쏘시개가 된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삼아 이중전환(디지털 전환과 녹색 전환)으로 대표되는 전환기의 사회적 대화까지 살펴볼 계획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사회적 대화는 협의의 과정이고 공유된 인식(shared understanding)을 확보하는 과정이라지만 ‘합의의 부담’까지 떨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유익한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라며 돌아서면 그뿐일까. 그렇다면 다시 정부의 일방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노사 사이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정부가 균형추 역할을 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들러리론’이 제기된 배경이다. 나아가 사회적 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성을 위해 헌신하는 계급타협의 기제라는 인식도 사회적 대화의 거부에 힘을 보탰다. 개량주의라는 낙인이 덧씌워졌다. 사회적 대화가 갖는 의미를 십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에서 가능할까라는 질문은 아직도 화두로 남아 있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원론적인 해석에 이어 문재인 정부 시절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통해 추진했던 사회적 대화가 갖는 특징을 살펴본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에 절은 과거의 노사정위원회와 단절된, 신자유주의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새로운’ 시도였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동존중사회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그 일환이었다. ‘87년 노동체제’를 뛰어넘어 새로운 노동체제(labor regime)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노동존중사회 구축은 소득주도 성장정책과 짝을 이루며 사용자 편향적인 사회적 대화를 벗어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노동계를 설득하지도, 사용자단체의 반발을 누그러뜨리지도 못했지만, 그것은 양극화 해소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포용을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의 끄트머리에서 신자유주의가 낳은 병폐와 맞닥뜨리려는 시도였다.

결과적으로 노동존중사회 구축도, 소득주도 성장정책도, 그리고 포용적 형태의 사회적 대화도 과거의 패턴을 벗어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의 사회적 대화가 실패한 이유는 또 다른 화두에 해당한다. 구조적인 문제가 드러난 탓이었을까, 그래서 경로의존성이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노사정 주체들에게 문제가 있었을까. 이를 사전적으로 해답을 정해 놓고 평가하기보다는 사회적 대화의 경험에서 그 원인을 찾아 귀납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 글의 입장이다.

사회적 대화의 위기는 이론의 위기

사실 지금까지 사회적 대화에 대한 경험은 체계적으로 축적되고 해석된 적이 없다. 한쪽에서는 외국의 이론과 사례를 수박 겉핥듯이 되풀이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제 논에 물대기 식으로 사회적 대화에 대한 찬반을 주장했다. 자기 편한 대로 과거의 경험들을 단편적으로 소환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천적인 경험이 사상된, 모래 위에 지은 성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상임위원을 지낸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권위에서의 ‘삶과 일의 역사’를 남기며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혜움터, 2023)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회적 대화의 경험은 당사자의 기억과 메모 속에 남거나 경사노위의 연례보고서에 박제된 채로 남았다. 예단된 이분법을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이어폰으로 귀 막은 듯 찬반 주장만 되풀이했다. 이분법으로 나누기엔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전략적 선택’(strategic choice)이란 말이 있다. 주어진 환경의 변화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대응함으로써 환경을 변형하거나 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주체의 대응에 따라 상황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사회적 대화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실패에 따르는 일차적인 책임이 정부에 돌아가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복싱은 링 위에서 선수들이 하지만 그 링을 만들거나 시합의 뒷 마무리를 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더욱이 정부는 링 위에서 뛰는 선수의 역할까지 겸한다. 노사 중심성의 원칙을 말하더라도 사회적 대화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위상이나 역할을 말하는 참이다. 물론 정부의 실패가 구조(환경)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지우고 시작할 필요는 없다.

사회적 대화란 무엇인가. 이 논의는 아무래도 국제노동기구(ILO)가 내린 정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ILO 자체가 국제적인 차원의 사회적 대화기구인 데다 ILO(2013)가 내린 정의가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고전적인 정의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대화는 정부, 사용자 그리고 노동자 대표, 혹은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가 경제 및 사회 정책과 관련된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벌이는 모든 유형의 교섭, 협의 또는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말한다.” 이 정의를 어떻게 해석할까. 이에 기대어 우리의 논의를 풀어 나가도 괜찮은 걸까.

사회적 대화의 위기에 앞서 사회적 대화에 관한 이론의 위기라는 게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온건한 공산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75)은 “20세기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바꾸려고 했을 뿐, 세계를 올바르게 해석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뒤집은 것이었다. 해석 없이 변화가 가능할까.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tjpark07@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