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석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미국 민주당이 이렇게까지 속절없이 패배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불리한 상황이라 생각하기는 했어도 적어도 경합까지는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유죄 판결, 암살 시도 등의 수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도널드 트럼프가 돌아왔다. 심지어 공화당이 상하원 양원을 모두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졌기에 더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더 강력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트럼프 2.0의 시대를 어떻게 봐야 할까. 예단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일관적으로 주장해 온 정책들을 통해 그 의미를 짚어볼 수는 있다. 트럼프 정부가 일관되게 시행하려는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불법 이민자로 대표되는 노동력의 이동을 제한하는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자유무역 정책에 대한 ‘수정’ 정책이다. 자유무역이 미해군의 세계 지배로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트럼프 정부가 보여주는 외교·안보 정책의 변화는 자유무역에 대한 수정과 궤를 함께한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런 정책들에는 별다른 근거가 없다. 예컨대 트럼프 진영은 WTO 같은 국제기구들이 미국에 불리한 자유무역을 강제하는 바람에 미국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주장해 왔다. 그 대표적인 수혜국으로 지목된 ‘중국’과의 단계적인 무역 단절을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면 정책의 합리성을 논하는 게 무의미해질 지경이다. 미국의 저소득층들이 과연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값싼 상품들 없이 생존할 수 있을까.

이민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코로나19를 계기로 대거 은퇴하며 생긴 노동인구 비율의 감소(67.3→60.4%)를 메우려면 이민이 불가피하다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1천 명당 23.7명이었던 1960년 신생아 수는 2021년 11명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으며,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이전했던 기업과 공장들이 미국으로 복귀하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은 비록 완화되고 있지만 여전하다.

오히려 주목할 지점은 기술산업에 대한 규제 완화다. 전통적으로 공화당과 그 지지층은 개인정보 보호, 사이버 보안 등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해 왔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규제 완화가 어려웠다. 대표적인 게 ‘망 중립성’ 문제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는 ‘망 중립성’조차 가차없이 폐지했다. 그 결과 미국의 서비스업 업체들은 특정 콘텐츠의 소비자들에게 더 빠르게 전송해 주는 것과 같은 특혜를 줄 수 있게 됐다. 마찬가지로 전기차·AI 등의 산업에서의 규제완화가 급진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일론 머스크와 트럼프의 결합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자본·노동력·기술·상품 등의 국제적 이동이 제한되고 규제완화를 통한 기술·서비스 산업의 발전을 꾀하는 트럼프 2.0 시대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대를 임금노예제에서 임금농노제로의 이행기로 파악한다고 할 때 트럼프 2.0은 노동력의 보다 고도한 조직화로 임금농노제 이행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을 성숙시키고 있다. 생산수단의 일부로서 ‘객체’에 불과한 노예와 달리 농노는 그 자신의 생산수단의 부분적 소유자일뿐만 아니라 경영의 ‘주체’이기도 하다. 농노가 토지에 긴박되는 대신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경영의 주체로서 지위를 인정받았던 것처럼, 임금농노 또한 국민국가에 긴박되는 대신 보다 고도한 경영단계로 이행하게 될 수 있다. 풍부하고 값싼 노동력에 기초한 경제운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주어진 노동력을 보다 잘 조직해 더 높은 생산성을 달성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자국민에 대한 보호를 외치는 트럼프주의를 단순히 파시즘과 등치하기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한국의 상황은 미국의 상황과 정반대다. 한국은 일자리·구직자 비율을 의미하는 유효구인배율이 2015년 이래 단 한 번도 1을 초과한 적이 없다. 2017년 0.65배였던 유효구인배율은 2020년에는 0.39배, 2023년에도 0.58배를 기록하고 있다.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가 1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데도 노동문제가 정치적 의제로 작용하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다.

모든 공공성이 대통령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는 ‘전제주의’ 때문이다. 노동조합 같은 직역단체들이 탄핵 집회 같은 곳을 제외하면 제도권에서 공적 주체로 나타나지 못하니 보다 고도한 노동력 조직화는 어불성설이다. 대통령으로 집중된 공공성을 분산시켜 노동자의 생애주기를 변화시키며 사회복지와 높은 생산성을 교환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어야 할 때다. 그런 지혜가 정치권에 있는지, 지켜볼 일이다.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fpdlakst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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