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제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 김건희 여사 공천개입 파동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김 여사가 2022년 6월 재보궐선거와 올해 4·10 총선 당시 명태균 등을 통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공천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 사건을 보며 전제주의를 떠올렸다. 한국과 같은 아시아적 사회에서 ‘공사(公私)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비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분석하며 아시아적 특질을 지닌 사회에서는 공사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공사의 분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공사 구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소농민이 토지소유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정립하는 데 실패하고 전제군주의 ‘국가적 토지 소유’하에 착취·수탈당하고 있다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전제군주는 소농과 전제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짓는 핵심적 요소로, 전제군주의 신체 내에서 공과 사는 구별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전제군주는 한편으로는 관료제를 비롯한 국가의 공적인 성격을 대표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외척 등의 사적인 성격의 가(家)를 대표하는 존재다. 흔히 ‘성군’(聖君)이라 불리는 탁월한 전제군주들은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 간의 균형을 적절하게 구현한 군주를 지칭한다.
여기서 핵심은 군주의 ‘사적’인 성격을 어떻게 제한하는가가 된다. 실상 국가적 토지 소유 실현도 전제군주를 대표로 하는 왕실 구성원들의 생계를 뒷받침해 주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예컨대 궁방전(宮房田)은 왕실과 왕족의 생계와 제사 등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소유권을 수여하거나 수조권을 지급한 토지였다. 이 궁방전의 존재로 많은 문제가 야기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궁방의 권위와 위세를 빌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이었다. 이런 일은 궁극적으로 국왕의 권위에 의존해 행해지기에 결국 전제군주가 자신의 지반인 백성들을 무너뜨리는 모순을 산출했다. 탕평군주로 칭송받는 영조조차도 궁방전 문제로 신하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비록 궁가에서 했다 하더라도 궁가의 주인은 전하가 아닙니까?”(<영조실록> 15권, 영조 4년2월.)
이처럼 전제국가에서는 전제군주의 권위·권력으로 수렴하는 궁방의 권위·권력 행사가 국가의 기초를 무너뜨려 전제군주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모순이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다르지 않다. 김건희 여사와 그 주변이 온갖 사안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대통령 권위·권력의 문제로 수렴된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이 모든 사달에도 기묘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전제군주조차 그 신하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책임자로 지목돼 규탄당하고 시정해야 했는데 여권의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대통령 부부 내외를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 더 문제는 어느 누구도 대통령의 진의를 모른채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한 몇몇 ‘해석자’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기 초만 하더라도 기자들과의 도어스테핑을 하며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했건만 잠깐이었다. 한마디로 대통령의 사적인 성격이 제한되지 않아 공적인 권위·권력이 무너지고 있다.
이처럼 모든 권력이 전제군주 한 사람에게 집중돼 군주의 ‘자의’(恣意)가 문제 됐던 전제주의적 특질이 제왕적 대통령제하에서 더 나쁘게 반복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대의제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지닌 문제가 유독 윤석열 정부에서 두드러지는 것도 입법부를 장악한 야당과의 대화를 거부하는 바람에 대의제의 견제가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론으로부터도, 의회로부터도 벗어난 대통령이 어떤 의사결정과정을 거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제는 여당마저도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입법부와, 언론과 대화를 해야 된다. 민주주의는 토론과 공개성에 기초해 운영되는 ‘말’의 질서다. 대통령이 말로만 자유민주주의를 외치지 말고 그것을 직접 구현하기를 권한다.
<지록위마의 시대> 작가 (fpdlakstp@naver.com)


그러다 겨우 한 꼭지의 칼럼으로 '대중' 운운하며 용광로에 숟가락을 얹고 있다.
대중이란 프레임에서 멀건히 떨어져 방관을 일삼다 이젠 용광로가 더 이상 끓는 점 최대로 끌어오르지 못하는 한계를 느꼈는지 그저 한 마디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