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가 연락이 안 돼.” 유정(27·사진)씨가 잠들 준비를 하던 때였다. 이태원에서 수백 명의 심정지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뉴스를 확인한 유정씨와 부모님은 집 근처 지하철역인 청구역까지 뛰었다. 유정씨는 동생인 고 유연주씨가 이태원에 간 걸 알고 있었다. 막차는 끊겨 있었고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이태원역 방향인 약수역까지 또 뛰었다. 2022년 10월29일 밤이었다.
이태원 참사 2주기, 유정씨는 “유가족의 99%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일교차가 커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때 힘든 순간이 잦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5일 오후 서울 약수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유정씨는 동생이 2년 전 겪었던 일들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는 지난달 23일 활동을 시작하며 이제 첫발을 뗀 상황이다.
인파 대책 왜 없었는지
특조위 조사에서 밝혀내야
-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태원참사진상규명법(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되고 특조위가 꾸려졌으니까 끝난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조사가 시작되지 않았다. 적어도 조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관심을 가져주고, 특조위가 활동을 잘하지 못한다면 같이 목소리를 내주셨으면 좋겠다.
30일 새벽 병원 소생실에서 (숨진) 연주를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연주가 되게 따뜻했다. 그런데 거기 있던 경찰은 부검을 하지 않으면 연주를 이 병원에서 데리고 나갈 수 없다고 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까 희생자가 병원으로 이송됐는지 안 됐는지도 몰라서 길거리에서 헤매고 다닌 가족들도 많았다. 희생자 바로 앞에서 ‘쟤가 내 딸이다, 아들이다’라고 말을 해도 못 만나게 하고 실종신고부터 하라는 말을 들은 가족들도 있었다. 내 가족이 왜 그날 거기서 죽었고, 사고 수습 과정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애초에 인파가 모일 걸 알면서도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는지, 그게 제일 궁금하다.”
- 특조위가 꾸려진 이후 서울서부지법이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된 박희영 용산구청장과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박 구청장 변호인단은 ‘용산구에는 인파 유입을 통제하는 규정이 없다’는 말을 하더라. 그런 자치구를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갈 수 있나. 서울,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모든 사람이 안전할 수 있도록 누군가는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 일을 안 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안 했다’고 하는 건 무책임하다. 한편으로는 무식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울경찰청은 용산경찰서의 상위기관인데, 용산구를 관리할 권한이 더 세다고 생각한다. 재판부가 책임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봤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책임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무죄를 받을 때마다무기력해지고, 우리나라 재판부를 못 믿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안전 걱정 없는 사회 만드는 데
이태원 참사 유가족도 함께할 것
-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외 필요한 조치가 있나?
“명예회복이다. 아직도 그런 말들이 들린다. ‘거기 왜 갔냐’ ‘귀신 축제하는 데 뭐 하려고 갔냐’. 유가족에 대해서도 그렇다. 우리 가족들은 완전 죽음을 이용해서 돈 벌려는 사람처럼 전락해 있다. 어디 가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라고 말하는 게 무서워지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계속 잠식한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걱정부터 한다. 참사가 났을 때 2차 가해가 당연히 따라오는 게 우리나라에서 불문율처럼 돼 버렸다.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처벌하면 ‘참사가 난 것은 잘못이구나’라는 인식이 퍼질 건데 그런 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활동은 계속할 계획인가?
“그렇다. 연주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나를 위한 일 같기도 하다. 동생을 보내 놓고 나서 전처럼 못 살겠더라.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유가족의 99%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나는 사람이 많은 지하철 타는 것도 떨리고, 사람 많은 데는 안 가고 싶다. 올해 4월에 총선이 있었다. 거리유세하는 후보들 앞에 사람 몰린 걸 항공샷으로 찍은 기사가 나왔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이태원 참사 사진이 떠올라서 숨이 가빠지더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유가족들도 그렇게 힘든 순간을 매번 겪고 있다.
활동은 아빠랑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4남매인데, 동생들은 어리기도 하고 공부 중이라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내가 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우리가 치유가 아직 안 됐다 보니까 이야기를 하면 감정이 확 올라온다. 그래서 너무 슬프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긴 하다. ‘오늘 연주가 꿈에 나왔어’ ‘야 이거 마라탕 유연주랑 같이 먹으러 왔으면 걔 진짜 좋아했겠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연주가 나랑 4살 차이인데, 원래부터 경찰을 꿈꾸다가 대학을 정보통신학과로 가면서 사이버수사관을 하겠다고 했다. 똑부러지고 용감하기도 하고, 바로 밑에 동생이라 내가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걸 연주가 가고 난 다음에 알았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기자회견, 삼보일배, 오체투지같이 바깥에서 하는 활동을 할 때마다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불편한데, 힘내라고 하시면서 지나가는 분들을 잊을 수가 없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매일노동뉴스>라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서울시청 분향소를 지키거나 행사 같은 거 하면 노조에서 진짜 많이 와 주셨다. 날씨가 덥고, 또 추운데 사람 많이 안 오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할 때가 많았다. 노조가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와줬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말로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보니 아쉬움이 항상 있었다. 이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안전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유가족들도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활동을 계속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