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순관 아리셀 대표에 대한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지난 8월28일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아리셀 참사 유가족들이 박 대표 구속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노동자 23명이 숨진 화성 아리셀 참사가 박순관 아리셀 대표이사와 그의 아들 박중언 아리셀 총괄본부장 구속기소 이후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아리셀은 민·형사상 합의를 하자면서도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합리적 보상이 필요하다는 유가족·대책위의 입장에 “중소기업이라 여력이 없다”는 답변을 되풀이하고 있다. 아리셀의 모회사인 에스코넥, 에스코넥의 원청인 삼성이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민·형사 합의 요청한 아리셀
“중소기업 처지 봐 달라”

29일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아리셀과 아리셀 산재피해 가족협의회·대책위는 지난달 28일 박순관 대표이사가 구속된 이후인 이달 중순께 협의를 재개했다. 닫혀 있던 대화의 창구가 박 대표 구속 이후에야 열린 것이다. 가족협의회·대책위는 당시 협의에서 드러난 쟁점에 대한 박 대표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구치소에 서신을 보냈고, 그에 대한 답변이 지난 27일 돌아왔다.

아리셀은 민·형사 합의를 하자고 밝혔다. 가족협의회·대책위는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의미를 담은 형사합의는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줄곧 밝혀 왔다.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중대재해에 대해 합당한 처벌이 이뤄짐으로써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에게도 한 가닥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민·형사 합의를 하자며 아리셀이 제시한 보상기준은 일용직 일당이다. 이 문제는 숨진 노동자를 아리셀 노동자로 볼 것인지, 파견업체 일용직으로 규정할 것인지의 문제와 닿아 있다. 숨진 노동자 23명 중 20명이 인력공급 업체 메이셀 소속이고, 3명은 아리셀 직원이다. 메이셀은 파견업체 허가를 받지 않고, 고용·산재보험도 가입하지 않은 유령회사와 다를 바 없다. 수사당국은 박 대표가 파견노동자를 직접생산공정에 투입해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있다.

아리셀은 가족협의회·대책위의 주요 요구를 거부하면서 “중소기업인 아리셀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고 거듭 강조했다. 대책위 관계자는 “아리셀 입장은 숨진 노동자가 끝끝내 자기 노동자는 아니라는 것”이라며 “박 대표가 구속기소 돼 재판을 앞두고 있어 사정이 급해지자 민·형사상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합의하자면서도 그 비용은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에스코넥, 삼성이 주 거래처이자 공급망
삼성SDI “아리셀과 사업관계 아냐, 정보도 없어”

중소기업을 자처하는 아리셀은 에스코넥의 자회사다. 에스코넥은 삼성전자에 휴대폰 금속부품을, 삼성SDI에 2차 전지를 납품한다. 전체 매출 중 아리셀이 차지하는 비중은 1%대에 불과하다. 박순관 대표는 에스코넥 대표이사를 겸직하다가, 구속되자 사임서를 제출했다. 이 때문에 아리셀을 에스코넥의 사업부문 중 하나로 규정하는 시각이 있다.

에스코넥이 어떤 이유로 아리셀을 별도로 분리해 운영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리셀이 불법파견을 적극 활용해 왔다는 점에서 1차 전지 변동 물량을 처리하기 위한 회사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아리셀이 독립회사가 아니라 에스코넥 소속이었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까. 삼성전자와 삼성SDI는 각각 ‘삼성전자 협력회사 행동규범'과 ‘삼성SDI 파트너사 행동규범’을 통해 하청회사의 준법경영과 책임 있는 경영활동을 주문하고 있다. 삼성 스스로 업체 선정부터 계약 종료까지 공급망 리스크를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아리셀에서 공급받는 상품이 없는 데다가, 아리셀이 에스코넥과 별도로 분리됐다는 점은 삼성이 아리셀 참사로부터 자유로운 이유가 되고 있다. 실제 삼성SDI는 공급망 공장에서 발생한 노동자 사망 사건에 대해 어떤 구제 노력을 기울였는지 설명해 달라는 기업과인권리소스센터의 질문에 “삼성SDI는 아리셀과 어떠한 사업 관계도 진행하지 않으며, 해당 회사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삼성전자는 자사 에어컨을 설치하다 숨진 하청회사 소속 고 양준혁(사망 당시 27세)씨 유족에게 최근 사과했지만 아리셀 참사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물론 삼성전자는 양씨 죽음에 대해서도 사건 초기에는 침묵하다 에어컨 설치 책임 주체가 삼성전자라는 계약서 내용 등이 공개되며 비판 여론이 일자 양씨가 숨진 지 29일 만에 사과했다.

▲ 반올림
▲ 반올림

국·내외 노동계
ILO·유엔 행사서 ‘삼성 책임’ 주장

전문가와 노동계는 납품받는 상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삼성이 아리셀 참사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정신영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는 “아리셀 물건이 삼성으로 납품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리셀과 에스코넥 대표는 동일 인물이고, 아리셀을 실제 지휘한 총괄본부장이 박순관 대표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두 회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해하고 대규모 참사와 삼성과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할 일을 적극적으로 찾는 삼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급망에 속한 에스코넥에서 발생한 참사라는 점을 인지하고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는 “이번 참사는 단지 국방부에 납품하는 1차 전지 부문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일 뿐, 이를 총괄 관리하는 에스코넥에서 벌어진 사고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며 “삼성은 협력업체서 벌어진 인권침해에 대해 연루 책임을 지는 것도 기업 인권실사 제도의 취지 중 하나라는 점을 인지·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셀 참사와 삼성의 책임 문제는 국제 사회로 점차 논의가 확산하는 모양새다. 최근 국제노동기구(ILO)가 노르웨이에서 개최한 근로감독 관련 기술회의(technical conformance)에서 국제노동계는 회의 참석 노사정 관계자들에게 한국 노동자들이 아리셀 참사에 대한 삼성 책임을 묻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달 24~2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유엔 아시아 기업 인권포럼’에서도 국내 기업과인권네트워크와 노조 관계자들이 해당 현안을 유엔 기구 관계자들에게 알렸다.

가족협의회·대책위도 다시 한번 삼성을 겨냥한다. 대책위 관계자는 “삼성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조하면서도 협력사에서 발생한 기업살인에 대해 아무런 입장 표명을 않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며 “삼성과 에스코넥이 이번 참사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24일 발생한 아리셀 화재 참사는 10월1일이면 사고 발생 100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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