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와 우리
아주 사적인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감상법
지난 6월 일군의 시네필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조나단 글래이저 감독의 이 영화는, 일반적인 ‘홀로코스트 영화’와 달리 나에게 특별한 ‘감상’을 안겨 줬다. 독일군 장교 가족은 높디 높은 ‘담벼락’으로 두터운 보호를 받는 저택에서 부인과 함께 ‘꽃 가득 정원’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가사노동은 요즘 서울의 소위 ‘필리핀 이모’와 같은 유대인 여성들에게 맡기고, 담벼락 밖에서 ‘유능한 남편’은 집안에서 가족에게 적당히 ‘스윗’하다.
담벼락 밖 ‘직장’에서 남편은 매우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제거’를 ‘사명감’으로 ‘번쩍이고’ 있지만, 가족들은 영화 내내 깔리는 정체 모를 ‘소리’처럼 담벼락 밖 그 진상을 알 수 없다(또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지독하리만큼 ‘담벼락 밖 상황’을 단 한 컷도 허락하지 않고 관객의 ‘선택과 상상’에 맡긴다. ‘담벼락 밖의 몇 컷’은 주인공 독일군 장교의 ‘직장에서의 성과’만큼이나 나치의 잔인성을 보여주기에 효율적 수단이 분명한데도 감독은 기어이 그런 쉬운 선택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장교와 그 가족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쪽보다는 이 구조가 어떻게 유지·강화되고 또는 반대로 어떻게 견제하지 않는지에 더 집요하게 조명과 카메라를 비추는 듯하다. 제목에서 실마리를 얻자면, ‘이익(또는 이해관계)의 구역(구조)에 관해 탐구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폭력적 세계에서 이해관계의 구조” 말이다.
‘텅 빈 박물관의 청소노동자’ 시퀀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박물관’에 영원히 저장됐다. 그 박물관은 나치와 인간 본성 타락의 유효적절한 입증 방법으로, 어쩌면 현재의 인류가 나치의 극악성을 징벌하는 효과적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다가 영화는 문득 카메라로 하여금, ‘일터’에서 퇴근하는 장교를 좇게 한다. 그 다음 ‘현재의 박물관’을 비추고, 다시 돌아와 갑작스런 구토로 괴로워하는 장교를 담는 동시에 다시 현재의 고요한 박물관 바닥을 닦는 여성노동자를 슬쩍 바라본다.
인간의 정신이 ‘가스라이팅’한 잔인함을 육체는 참지 못하고, 결국 역겨움을 폭발적으로 게워 낸다. 내게 ‘구토’는 ‘육체의 신묘한 균형 작용’이자, 스크린 안과 밖을 연결하는 ‘스타게이트’였다. 그러고는 내게 묻는다. 담장 안 박물관에서 서서 버려진 유대인들의 낡은 신발을 ‘구경’하며 ‘장교 가족’을 ‘악인’으로 평하고 그칠 것인가.
홀로코스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 사회는 더욱 고도화되고 복잡성을 띠었고, 폭력과 착취, 차별 역시 교묘해졌다. 현대 사회에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외주화(부수화)된 삶, 청소노동자, 그 모든 상징을 상상해 본다.
2. 현재적 성찰과 ‘떠나간 사람들’
최초의 현대적 인간으로서 ‘동주’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는, 일제가 꾸며놓은 신문조서를 받아 들고는, ‘몽규처럼 치열하게 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인정할 수도 있었지만) 부인한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동무를 /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는, 그가 우리가 아는 범위에서는 근대 이후 가장 현대적인 최초의 인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성찰’은 두고두고 가슴 속에 고이 접어두고 싶다.
‘필리핀 이모들’을 찾는 모험
‘담장 안 이익의 구조’에 익숙해져 이익의 강도와 향유는 점점 강화되고, 이해관계의 손익 계산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공감능력은 급속도로 저하되는, 그 ‘박물관의 거울’에 ‘현재’를 비춰볼 것인가.
그런데… ‘필리핀 이모’들은 왜 우리를 떠난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