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십 년 넘게 노동자를 상담하고 소송해 오다 보니 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사건이 마무리되는 걸 수도 없이 지켜봐 왔다. 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데도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고, 재판 중 소송을 취하해서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는데도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기도 했다. 노동자를 대리하는 노동변호사로서 법적으로 노동자의 권리가 실현되는 데 누구보다도 관심이 있는 나는 그걸 볼 때면 어떨 때는 아쉽고 어떨 때는 안타깝기도 하다. 특별히 노조가 조직돼 있지 않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이기에 이렇게 노동자의 권리 포기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노조가 조직돼 있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업장에서도 그 조합원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는 일이 일어난다. 비정규직이라서도 아니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아주 쉽게 포기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동자들의 권리 포기는 사용자를 상대로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는 소송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부제소합의를 통해서 나왔다.
2. 어디 보자. 지금 내가 수행하고 있는 소송사건 중에서 보자면, 기아·현대제철·현대자동차 등의 통상임금 소송 사건, 한국지엠·현대차·현대모비스·현대제철 소속 사내하청·비정규직의 불법파견 근로자지위 소송사건을 비롯해서 많은 사건이 있다. 어느 것 하나 부제소합의와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 없다.
기아·현대제철 등 통상임금 사건은 이미 고등법원·지방법원에서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며 승소판결을 받은 상태에서 노조가 사측과 합의하고서 조합원들이 대거 소송을 취하하도록 했다. 소취하와 함께 당연히 사측에 부제소합의서를 제출하고서 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임금권리의 일부만 지급받은 채 나머지 권리를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현재 부제소합의하지 않고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소송하고 있는 조합원들도 있는데, 이 소송사건에서도 노사합의 등을 내세워 사측이 부제소합의를 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나와 공방을 벌여 왔다.
사내하청·비정규 노동자들이 원청 사용자를 상대로 한 불법파견을 주장하며 근로자지위 확인을 청구한 소송사건에서 사내하청업체 내지 자회사 고용을 무기로 소송 취하와 함께 부제소합의를 압박해 왔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는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이라며 원청 근로자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 상태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부제소합의를 통해 권리 포기토록 하는 사업장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노조가 조직돼 있지 않아서도 아니다. 민주노조가 아닌 어용노조여서도 아니다. 이 나라에서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조직활동을 해 온 사업장들인데도 이와 같은 부제소합의를 통한 노동자의 권리 포기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그렇지 않은 사업장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얼마나 심각하게 부제소합의를 통한 노동자의 권리가 발생하고 있겠는가.
3. 사실 이처럼 소송 취하와 관련해서만 심각한 것이 아니다. 사용자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시키는 부제소합의는 소송 중인 경우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소송하고 있지 않아도 장차 소송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에게 부제소합의를 통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게 한다. 퇴직·인사·임금 등 노동자의 권리와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 사용자들은 부제소합의를 활용해 왔다. 대표적으로 법적 퇴직금 외에 위로금을 지급하면서 노동자를 퇴직시키는 경우를 살펴보자. 위로금을 받으려면 노동자는 사용자가 요구하는 부제소합의서를 제출해줘야 한다. 퇴직 이후에 사용자를 상대로 해서 소송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런 합의서를 제출해 줘야만 위로금을 받을 수 있으니, 사용자를 상대로 어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노동자로서는 사용자가 요구하는 대로 작성해서 제출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명예퇴직·희망퇴직시에 퇴직위로금을 지급받으면서 이렇게 부제소합의서를 제출해 주게 된다. 그래서 이렇게 퇴직하게 된 노동자들은 퇴직한 뒤에 자신의 노동자권리가 침해된 것을 알게 돼도 사용자를 상대로 소송하기 어렵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상여금의 통상임금 해당성, 경영평가성과급의 평균임금 해당성 등에 관한 법원 판결이 나와서 퇴직노동자들이 찾아와 소송하고자 상담했을 때 나는 부제소합의서를 제출했는지를 물어야 했다. 대부분의 경우 부제소합의 때문에 소송할 수 없었다.
4. 오늘 내가 이렇게 부제소합의에 관해서 말하게 된 것은 지난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던 정년연장 입법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발제 논문을 읽게 돼서다.
고령자의 고용 차별을 금지하는 입법제도와 관련해서 미국의 경우에는 연방법률(The Age Discrimination Emplayment 1968)에서 40세 이상 노동자에 대해 고용 및 해고, 보수, 고용기간, 근로조건 및 복리후생 등의 차별을 금지했다. 정년퇴직 제도는 금지됐다. 다만 예외적으로 명예퇴직금 등 보상금을 추가로 지급하는 자발적 퇴직은 금지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서 사용자들은 명예퇴직금 등 보상금 지급을 대가로 부제소합의를 받아서 활용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됐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입법(Older Workers Benefit Protection Act 1990)을 통해서 부제소합의에 대한 절차적 요건을 부과했다. 그 요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부제소합의의 서면작성 ② 법적 권리와 청구권의 명시 ③ 부제소합의의 일자 및 추후 발생할 권리나 청구권의 존속 명시 ④ 기득의 권리와 별도로 가산되는 보상 명시 ⑤ 합의 전 변호사와의 서면 상담 권고 ⑥ 합의 전 숙려 기간 21일 이상(팀, 부서의 경우 41일 이상) ⑦ 7일 이내 취소 가능 등이다. 미국 대법원은 이 요건을 엄격히 해석햐 이러한 절차적 요건에 흠결이 있으면 부제소합의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상이 토론회에서 발표된 노호창 교수의 발제 논문에서 소개된 미국법상 부제소합의에 대한 절차적 규제 내용이었다.
5. 솔직히 놀랐고, 많은 생각을 했다. 비교적 해고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미국에서 이같이 고령노동자를 보호하는 입법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정년퇴직 제도가 입법을 통해서 금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부제소합의에 대한 절차적 규제를 통해서 노동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 나라는 놀라고 입법을 고민해야 마땅하다. 앞에서 본 것처럼 부제소합의를 통한 노동자의 권리 포기가 횡행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그에 합당하게 명예퇴직뿐만 아니라 부제소합의를 통해 노동자의 권리 포기토록 하는 걸 규제할 수 있도록 모색해야 할 일이다. 노동자의 일반적인 권리 포기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 부제소합의가 횡행해서 노동자의 권리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면 국가가 입법을 통해서 규제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미국에서 고령노동자 보호를 위해서 부제소합의를 절차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것처럼 법적 규제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일 것이 있다. 노조가 앞장서서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 나라 노동운동은 심각히 생각을 해 봐야 한다.(여기서 노동자의 권리 포기란 이미 노동자에게 발생한 권리를 말한다. 그렇기에 단체협약 체결 등을 통해서 기존 기준을 낮추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사용자와 노동자 권리 포기를 사용자와 합의해 왔다. 노조는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단체라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정의하고 있다(2조). 이에 따르면 노동자의 권리 포기를 도모하는 단체는 이러한 노동조합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기존 노동자의 권리보다 향상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활동해야 할 노조가 오히려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하는 협상을 사용자와 하는 것. 그것은 이 나라 법이 정의한 노조의 일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